한눈에 들어오는 전라도 너른 평야를 가로질러 한참을 달렸다. 황토빛 흙이 익숙해질 무렵 우뚝 솟은 바위산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영암에 들어서니 어디를 가도 월출산에 둘러싸인다. 남도 문화 중심지 영암은 월출산의 정기를 품고 2200년 역사를 이어 왔다.
‘달이 떠오르는 산‘의 정기를 받은 영암 구림마을
“남쪽 고을에 그림 같은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오르지 않고 이 산에서 오르더라.” 최초 한문소설을 지은 매월당 김시습은 월출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령한 바위’라는 뜻의 영암. 월출산을 보고나서야 그 이름 뜻이 저절로 수긍된다. ‘달이 떠오르는 산’의 빼어난 정기 덕분일까. 영암은 삼한시대부터 남도의 문화를 주도해왔다. 월출산 주지봉을 주산으로 좌우 용마루에 안겨 있는 구림마을은 장장 22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다.
일본고대문화의 시조 왕인박사를 비롯해 풍수도참사상과 불교 중흥에 힘쓴 도선국사, 고려 건국 일등공신 최지몽, 형미 선각대사, 경보 동진대사, 광주 목사 임구령이 모두 구림마을 출신이다. 그 뿐 아니라 최경창, 박이화, 박순우 등 이름난 문인의 자취까지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다. 구림마을에 녹아있는 2200년 이야기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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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마을 이야기 첫 실타래, 도선국사의 탄생
유채꽃이 바람을 안고 흐늘거렸다. 원래 마을 앞을 흐르던 바다 대신 노란 유채 밭이 넘실거린다.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 하여 큰 기대를 하고 찾은 곳. 월출산을 병풍삼아 기품 있게 자리한 마을은 생각보다 훨씬 고요하다. 구림마을은 북쪽을 북송정, 동쪽을 동계, 남쪽 산밑을 고산·남송, 서쪽을 서호정이라 칭하고 열두 동리 600여 호 대촌을 이루고 있다. 낭주 최씨, 함양 박씨, 연주 현씨, 해주 최씨, 창녕 조씨, 선산 임씨 등의 집성촌은 푸른 숲과 어우러져 단아함을 드러낸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구림마을’의 유래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의 마을 이름에는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얽혀 있다. 성기동 구시바위에서 최씨 성을 가진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가 푸른 오이가 떠내려 온 것을 먹고 아이를 가졌다. 처녀가 낳은 아이는 숲속 바위에 버려졌는데 며칠 후 바위에 가보니 비둘기 떼가 날개로 아이를 덮어 보살피고 있었다. 그 아이가 풍수도참사상의 시조로 고려 건국을 예언하고 불교 중흥을 일으킨 도선국사다. 그 후 이 바위는 ‘국사암’, 그 숲은 ‘구림(鳩林)’이라 명명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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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구림마을 중심에 국사암이 자리 잡고 있다. 낭주 최씨 선조를 모시는 사당 ‘국암사’ 마당에 바위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마당 안쪽에 국사암이 있다 보니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마을 주민의 안내를 받거나 지도를 펼치고 꼼꼼히 찾아가야 구림마을 이야기 실타래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전설이 된 포구마을 이야기
영암하면 ‘왕인박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도선국사가 태어나기 500여 년 전 백제의 왕인박사는 논어 10권 천자문 1권과 도공, 야공, 제기 기술자를 모아 일본에 문물을 전파했다. 일본 고대문화의 시조라고까지 불리는 왕인박사는 영암 구림마을의 상징과도 같다.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 ‘상대포‘의 흔적은 구림마을 도기문화센터 옆에 남아 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중소 규모의 선박이 드나들 정도로 큰 포구였는데, 지금은 손바닥만한 호수로 전락했다. 간척사업으로 포구는 육지가 되고 영산강으로 합쳐지는 수로만 남았다. 그 자취를 기리는 정자만 물에 떠 있으니 옛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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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마을은 뒤로는 월출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흐르던 곳이었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을 따라가는 350리 길 여행은 담양에서 시작해 영암에서 끝난다. 부드러운 갯벌이 서해를 어루만지는 영산강 끝자락의 영암은 ‘영산강 유역 종합개발사업’ 및 간척사업으로 갯벌을 잃었다. 대불국가산업단지와 삼호지방산업단지를 얻었지만 구림마을의 역사가 깃든 서호강과 상대포는 꿈처럼 아득해졌다.
공부한 만큼 재미를 찾을 수 있다
구림마을에는 조선시대 가슴 아린 로맨스도 숨어 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조선 선조 함경도 경성의 명기였던 홍랑은 고죽 최경창에게 ‘묏버들 가려 꺾어’라는 사랑 고백을 보냈다. 문헌공의 18세 후손인 고죽 최경창 선생은 백관훈, 이달과 함께 조선시대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기생과의 사랑이 빌미가 되어 파직까지 당했지만 고죽은 ‘홍랑에게 주는 글’을 자신의 문집에 떳떳이 남겼다. 신분을 넘어 뜨거운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을 위해 구림마을에는 고죽시비와 홍랑가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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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심부로 다시 나가면 웅장하게 서 있는 정자 ‘회사정’을 만난다. 원래 건물은 6.25때 소실되고 1986년 단청을 입혀 복원했다. 주민 자치 조직인 ‘대동계’의 집회 장소로, 또 3.1운동때는 독립만세를 울렸던 역사의 현장이다. 대동계는 마을 규약을 어기는 사람은 훈계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을 합치면서 500년 넘게 이어온 동계(洞契)다. 연주 현씨 가문의 종손 현삼식씨는 “마을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는 비결은 대동계에 있다”며 “지금까지 구림마을은 대동계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지켜가고 있다”고 답했다.
회사정에서 물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죽정서원이 나온다. 죽정서원 바로 왼쪽에 세워진 간죽정은 금성별곡을 지은 박성건이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은 곳이다. 그 밖에 호은정, 육우당, 서호사, 동계사,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전남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명석비와 조종수 가옥이 있다. 구림마을은 잘 정돈된 관광지가 아니라 조상 대대로 가문을 이어오며 사는 마을이다. 공부하는 열정을 갖고 둘러봐야 찾아내며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왕인박사유적지와 도기문화센터
구림마을 이야기 실타래를 쫓아가는 게 벅차다면 도기문화센터와 왕인박사유적지를 들르는 것이 좋다. 봄이면 솜사탕 가루처럼 흩날리는 구림마을 일대 벚꽃길에서 ‘왕인문화축제’가 열린다. 왕인박사유적지는 구림마을 동쪽 필봉 기슭에 있다. 왕인박사 위패를 모신 왕인묘, 왕인박사를 상징하는 계곡 성천, 2.75m높이의 왕인석상 및 전시실이 잘 정돈돼 있다.
구림마을 입구 영암도기문화센터는 영암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옹관과 구림도기, 가마터 등이 전시돼 있고 도기제작 체험도 직접 할 수 있다. 구림마을 인근 에는 10여개의 가마터가 있어 한 두 군데 정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설립한 영암도기문화센터는 최근 공립박물관으로 승격됐다.
오는 11월에는 영암 구림마을에서 ‘한옥건축박람회’가 열린다. 2200년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곳에서 한옥과 한심체험을 연계해 펼칠 계획이다. 구림마을은 혼자 올 경우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가기가 쉽지만은 않다. 왕인박사유적지와 도기문화센터가 근처에 있지만 조용한 마을에서 2200년 역사를 체험하려면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마음에 품고 와야 한다. 더 긴 이야기 실타래를 풀고 싶다면 30여 곳에 달하는 구림마을 전통민박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맛집/
구림마을 내에는 마땅한 식당이 없다. 민박을 할 경우 마을 주민과 식사를 하면 된다. 하루 방문객이라면 영암읍이나 독천낙지마을을 찾는 것이 좋다.
숙박/
서호정민박/ 구림마을 회사정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061-472-0645
비둘기민박/ 구림마을 내에 있다. 061-472-0009
연주민박/ 국암사 옆 쪽에 있다. 061-472-1185
가는 길/
영암 버스정류장에서 목포행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왕인박사유적지 앞에 내려준다. 승용차로 올 경우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2번국도를 타고 영암방면으로 온다. 영산호를 지나학산면 소재지에서 좌회전해 819번 지방도로에 진입하면 구림마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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