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에 결혼하면서 LG 카드 본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가진 돈이 없어 신혼여행을 외국으로 못 가고 중고차를 몰고 포항, 울릉, 강릉 등 전국투어를 다녔죠. 신혼여행을 하면서 아내에게 말했어요. 돈 많이 벌면 꼭 해외여행을 시켜주겠다고. 대학교 때 근로장학생으로 미국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봤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커피에 얽힌 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2004년 즈음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받던 시기였어요. 저는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었지만, 장사를 하고 싶었어요. 평소 요리를 좋아했거든요. 회사 다니면서 요리학원과 강릉 유명 맛집 대표로부터 요리를 배웠어요. 젊고 혈기왕성한 추진력에 당시 잘 나가는 회사를 과감히 때려치우고 작은 가게를 계약을 했죠. 오픈 준비를 하던 중 배가 아프다는 아내와 병원 가서 내시경을 받았는데 위암 말기 암 판정을 받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아내 병간호를 했죠. 회사도 그만둔 상태라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보험을 시작했어요. 보험 하기 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는데 고객들을 카페에서 만나면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다가 나중에는 에스프레소를 마실 정도로 커피 맛에 끌렸어요.”
그가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체의학 치료법의 막스 거슨 박사의 커피 관장 때문이었다. 암 환자들이 한 번은 시도해본다고 해서 아내도 시도를 했지만, 지속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 후 더 좋은 커피를 알고 싶었다. 보험 고객에게 신선한 커피를 내려 드리기 위해 멸치 통으로 볶아 커피를 대접했다. 그러던 와중 32살인 아내는 그 해 겨울 세 명의 아이를 가슴에 묻고, 눈에 담아 또 다른 나라로 떠났다.
“아내를 보내고 한동안 술로 살았어요. 아이 셋을 둔 아빠의 무게감이 참 만만치가 않았어요. 2004년엔 커피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았는데 자료조사를 하다가 커피 월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분당 ‘가비양’ 양동기 사장님을 찾아갔어요. 커피 볶는 것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카페 옆 공원에 텐트를 치고 낮에는 고객들을 만나 계약을 하고, 미팅이 없는 날에는 로스팅과 커피 추출을 배웠어요.”
첫 가게는 2007년도 경상대학교 정문 공원 근처에 오픈했다. 상권이 활성화되기 전이었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힘들어 하루 오만 원의 매출도 나오지 않았다. 한달이 지나자 매출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즈음, 커피 맛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서 술을 마시려는데 술이 딱 떨어졌어요. 다시 술을 사러 나가자니 그렇고, 마침 베란다에 한 달 정도 방치된 막걸리 한 통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막걸리를 무심코 마셨어요, 이건 뭐지? 쫘악! 극강의 신맛이었어요. 처음으로 느낀 맛이었죠. 커피의 맛에 대한 깨달음은 막걸리에서 영감을 얻은 셈이죠. 사람들이 커피에서 어떻게 신맛이 나느냐고 물어보면 막걸리로부터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후론 커피 맛의 기준을 정할 수 있었고 막걸리의 청주만 마시거나 숙성시켜 마시는 애주가가 되었죠”
2살, 5살 7살 된 어린아이를 위해서 재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커피, 와인, 막걸리,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강단에 설 수 있는 경영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마산대학교 바리스타학과, 호서직업전문학교 호텔관광학과, 외부 강연 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 중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직 미완성이다. 두 번의 사랑이 찾아왔지만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카페는 계속 잘 되었어요. 손님들도 줄 서서 기다렸다 커피를 마시고 갈 정도로 알려졌어요. ‘다른 지역엔 왜 카페가 없냐?’라는 질문을 많이 하셔서 2010년 진주시 평거동에 2호점을 냈어요. 음악 감상 전문 카페와 커피 아카데미 매장을 오픈했었고 다른 곳에는 낮에는 커피, 저녁에는 와인과 수제 맥주를 파는 4곳의 카페를 오픈했었습니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했던가요? 체계적인 시스템이 되지 못한 단계에서 확장을 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어요. 4개의 카페를 관리하는 것은 결국 사람 관리였어요. 2곳의 매장을 운영할 때는 근무자와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매장이 늘어나면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일하게 되고, 생각과 습관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 둘 접하다 보니 현실과 이상의 차이로 인해 큰 결정을 내려야 했었죠.”
”얼마 후 본점 건물 매매 계약과 동시에 부동산 업자는 다른 건물을 사라며 권했어요, 마음에 둔 건물이 있다고 대답했는데 말을 하다 보니 같은 건물인 거예요. 운명이었는지, 본점을 건물만 매각하고 평거점, 학원을 모두 이전하고 지금 이 건물을 샀죠. 3개월 정도 내부를 바꾸고, 정원을 손보기 시작했어요.“
‘Memory, Turn your face to the moonlight
Let your momory lead you
Open up entry in
If you find that the meaning of what happiness is.
Then a new life will begin’
‘기억, 고개를 돌려 기억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
“힘든 시간을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건 여행이에요.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여행을 택했어요. 1년에 한 번씩은 아이들과 여행을 다녔어요. 남미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로 국경을 넘을 때 한국과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과 환전하는 호객행위.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로 되돌아가는 상상 속의 날들이었죠. 그때 함께 느끼고 나누었던 시간이 나와 아이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아요. 여행이 좋은 건 뭉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특히 외국여행이라면 더욱 그렇죠. 네비를 켜고 가다 보면 아이들이 길잡이 역할을 할 때도 있었어요. 서툴렀던 아빠의 행동도, 어렵기만 한 시기도, 어깨를 뚝 치며 건네는 몇 마디 말로 지난 시간이 용서가 되었으니까요. 렌터카 안에서 아이들과 나눈 추억은 잊지 못해요.”
자전거 바퀴가 수시로 펑크가 날 만큼 험난한 길이었고 하루 종일 사람 한 명 만날 수 없는 스페인 산골 오지의 길을 갔어요. 때로는 끌고, 때로는 자전거를 메고 다녔어요. 70년대 새마을 운동할 때나 보았던 비포장도로를 아름답다던 유럽의 자전거 도로에서 만나게되다니. 맨땅에 자갈길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때 보름간 다녔던 자전거 여행은 해병대 6개월 훈련보다 더 힘들었고, 헬스클럽 일 년 동안 다진 근육량 보다 더 많이 만들어진 것 같았죠. 상상할 수 없을 일들이 일어나더니 길동무가 생겼어요.
펑크를 때우는 어댑터를 챙기지 못한 나에게 어댑터를 가진 자전거 여행자는 천사 같았어요. 스페인 친구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자전거 사랑에 빠졌는데 제가 몬스터라고 별명을 지어 줬었죠. 어찌나 다리 힘이 센지 끝이 없는 오르막길을 난 죽을 것 같았는데, 그 친구는 묵묵히 쉬지 않고 자전거로 올라가더라고... 괴물 같은 그 친구도 나중에는 엉덩이가 아파서 제 자전거와 바꿔 타고 가자고 이야길 하더군요. 먼 타지에서 만난 그 이앙키 inaki 친구와는 얼굴 표정, 손짓, 발짓으로 모든 대화가 통했죠. inaki 친구와 헤어진 후 외로움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노란 해바라기 밭과 자전거로 몇 시간을 달려 보았던 보라색으로 펼쳐진 라벤더 밭, 사람보다 자연이 주는 장관에 다시 힘을 얻어 페달을 밟을 수 있었어요. 오지에서 사람을 찾아다니며 보았던 풍경, 아~~~ 그 풍경들이 너무 좋았어요.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좌절했던 남자도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1년, 5년이 지나
공개수업이 있는 날 세반을 뛰어다녔던 학부모도,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공 했던 아빠도
함께 여행하며 멋진 풍경을 보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흉터를 새기게 된 시간도,
자전거를 타고 강 따라 본점까지 달리는 남자도
아이덴티티가 사랑인 ‘커피 플라워’에 있었다.
“첫째는 감수성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감수성에는 사랑이 들어가야 하는데, 사랑 없이 커피숍을 한다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봐요. 카페라는 공간은 찾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해요. 또 다른 배려라 할 수 있죠. 자신이 꽃을 싫어한다고, 잔디 관리가 힘들다고, 다 안 한다면 안 되죠. 내가 싫어도 손님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카페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고 봐요.
둘째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건데. 창업하는 사람 옆에는 항상 도움이 되는 사람이 필요해요. 힘들면 토닥거려 줄 사람이 필요하고, 단 5분이라도 카페를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해요. 혼자서는 하기엔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요.
셋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해요. 항상 웃을 수 있는 마음, 다정하게 인사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리 커피가 맛있어도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지 못한다면 손님은 더 이상 오지 않죠. 공구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해요. 드릴은 기본, 건물 유지 보수, 화장실 변기 뚫는 것, 정원 잡초 제거하기, 화단에 물줄기, 잔디 관리하기 등 만능이 되어야 롱런할 수 있어요. 제 창고에는 없는 공구가 없을 정도로 많아요.
넷째는 장, 단기적 계획과 목표가 명확해야 해요.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어요. 꼼꼼하게 카페 운영 시스템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하구요. 계획을 세우더라도 잘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다섯째. 카페는 마음의 수양처라고 생각해야 해요. 생각지도 뜻하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져요. 마음을 내려놓고 현실을 직시하고 차근차근 헤쳐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죠. 이 모두를 두루 갖추었다면 카페 창업을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중남미 코스타리카 쪽으로 가서 히피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해요. 과테말라에 여행 갔을 때 현지인들의 삶이 너무 평온해 보여서 이민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현지인처럼 살고 싶어요. 다시 남미 여행을 계획 중인데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가게를 좀 더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해 놓고 또다시 여행을 떠나려 구요”
때마침 남미 여행서가 차 안에 있었다. 단숨에 읽었던 책이라 선물하고 싶었다. ‘남미히피로드’ 책을 보더니 색감이 너무 좋다며 딱 자기 스타일이라고 한다. 자신이 먼저 읽고 아들에게 보여줘야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인간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들려는 본능을 가진 존재라 한다. 부케향 가득한 사랑이 황대표에게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영화 ‘맘마미아 2’ 주인공 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