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급한 북핵 문제를 논하는데 있어 어찌 한가롭게 도연명을 거론하는 가라는 물음은 북미 양측의 입장과 처지의 변화 때문이다. 부시행정부 1기를 거쳐 중간선거 이전까지 지난 6년간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인식은 깡패국가(rogue state) 그 자체였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차관보의 평양 방문으로 북핵 문제가 표면화된 이후 정권교체(regime change)는 부시 연설의 단골 멘트였다. 그러던 미국의 대북 인식이 변화한 것이다. 이라크 전쟁의 수렁과 중간 선거 패배가 가져온 결과다.
이와 같은 인식과 입장의 변화로 마침내 북핵 폐기 합의를 공동성명이 도출됐다. 북핵 6자회담 참가국들은 북한이 핵폐기를 위한 초기단계 이행조치로 60일내 `불능화 조치'(disabling)를 수용할 경우 연간 최대 중유 100만t으로 환산되는 에너지와 인도적 지원을 북한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차관보의 방북이후 야기된 2차 북핵 위기는 지난해 10월 핵실험으로 최악의 위기를 맞았으나 해결의 교두보를 확보g했다. 합의문 도출로 각국은 북핵 사태를 외교적 평화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국제레짐을 갖추게 됐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합의문의 기본 성격은 폐기와 동결의 전형적인 구도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최선을 다한 다는 점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했던 94년 제네바 합의와 맥을 같이 한다. 반면 금번 합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과거 북핵 합의와 차별화된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첫째, ‘시간’이 포함된 로드맵을 구체화함으로써 합의문 이행에 청신호가 울렸다. 2개월 이내 조치가 진행될 경우 에너지 지원을 실행에 옮긴다는 조항은 과거 어떤 북핵 합의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한을 못 박음으로서 ‘창조성 모호성’이란 부제로 포장되었던 2005년 9&8228;19 공동성명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단계별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하여 합의이행에 추동력을 불어 넣었다.
둘째, 이번 합의는 과거 어느 북미합의보다 미북 양측의 최고 지도자의 의지가 무겁게 실려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핵실험이후 강공책보다는 안보리 결의안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박 앞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의 수렁으로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북핵을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판단하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원칙인 CVID 보다는 북핵 관리에 초점을 두는 CVIM(management)으로 대북 전략을 수정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여튼 부시가 기존 금기사항을 깨고 북미 양자대화를 감행하는 등 합의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셋째, 실무그룹(working group) 회의를 구성함으로써 동북아의 북핵 긴장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다. 미북, 미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양자회담이 명기되었다. 적성국가와 테러리스트 명단제외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간의 합의들이 단기적인 합의에 주력함으로써 각론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는 주제들이 이행과정에서 암초로 작용했다. 이번 합의는 북핵 폐기를 구체화하는 미시적 차원의 실무논의 장치가 포함됨으로써 항구적인 차원의 동북아 평화체제 담론 형성이 가시화됐다.
그러나 북한이 정권 생존의 보루로서 수십년에 걸쳐 개발한 핵을 폐기한다는 것이 말처럼 원활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동결-폐쇄-불능화라는 핵폐기의 실질적인 과정은 이제 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특히 제네바 합의가 양측의 불신으로 이행이 지연되면서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던 역사가 생생한 만큼 합의문의 성실한 이행이 관건이 될 것이다.
또한 각국이 n/1 로 에너지 지원 원칙에 합의했으나 각국의 이해상충으로 대규모 지원은 쉽지 않는 과제다. 에너지지원 그룹의 대표를 한국이 맡은 만큼 에너지 ‘독박’의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이 핵만 포기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것 같았던 각국의 입장도 마지막에는 방관자 자세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북핵 폐기의 대상이 핵시설은 물론이고 핵무기 및 고농축 우라늄(HEU) 까지 포함되는지 분명치 않은 합의문도 최대의 약점이다. 북한이 폐기 단계를 넘을 때마다 추가적인 요구를 내놓는 살라미(salami) 전술도 복병이다. 특히 이번 합의가 어디까지나 ‘초기단계 이행조치’에 대한 상응조치만을 명시했다. 60일이후 추가적 이행조치와 상응조치를 다시 정해야만 하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악마는 작은 곳에 있다”라는 미국 속담처럼 단계마다 항목마다 지뢰밭이 깔려 있다. 각국이 2.13 합의가 북핵 폐기를 위한 마지막 대헌장(Magna Carta)이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정책만이 살길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3월부터 남녘에서는 꽃소식이, 북녘에서는 북핵 폐기의 훈풍이 봄바람을 타고 한반도를 감싸기를 기대한다.
남성욱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namsung@korea.ac.kr)
-現 KDI 국제정책대학원 갈등조정협상센터 자문위원
-現 고려대 북한학연구소 소장
-現 (사)남북경제연구소 소장
-現 한국북방학회 회장
-前 북한연구학회 연구이사
-前 KBS 북한문제 객원해설위원
-前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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