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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방성훈 기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미국 국방부 청사. 미국 최고 장성인 마크 밀리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탈레반이 최근 아프간 420개 지구 중 절반인 210곳을 장악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상황이 묘했다. 지난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9·11 테러 20주기인 오는 9월11일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을 완전 철수하겠다고 했고, 이를 다시 8월31일로 조정했다. 밀리 의장이 탈레반의 아프간 함락 가능성을 거론했을 때 주둔 미군의 95%는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를 틈타 탈레반이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게 밀리 의장의 경고였다. 그럼에도 국제사회는 아직 탈레반의 빠른 세력 확장을 체감하지 못했다.
이후 상황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탈레반은 이달 초부터 순식간에 아프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지난 6일 아프간 남서부 님로즈주(州) 주도인 자란지를 장악했다. 탈레반의 첫 주도 점령이었다. 이후 12일 아프간 제2, 제3의 도시인 남부 칸다하르와 서부 헤라트를 손에 넣었고, 13일에는 수도 카불에서 50㎞ 떨어진 로가르주의 주도 풀-이-알람까지 장악하며 수도권을 압박했다. 그렇게 탈레반은 15일 아프간 정부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들 전원은 이날 카불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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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정부 지도부의 무능·부패
탈레반은 2001년 미군의 공습으로 정권을 잃은지 20년 만에 아프간을 완전히 접수했는데, 실질적인 함락 기간은 사실상 몇 개월에 불과했다. 예상을 뒤엎은 탈레반의 세력 확장에 미국, 영국, 독일 등 주요 서방국은 패닉에 빠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비극이 벌어졌을까. 첫 손에 꼽히는 게 친미 성향 아프간 정부의 무능과 부패다. 20년간 미국에만 의존하며 자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프간 정부와 군경 관료들은 미국 지원금으로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데 급급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아프간은 왜 이렇게 빨리 무너졌나’ 기사에서 “아프간 군인과 경찰들은 굶주려 있었고 탄약조차 제대로 구비하지 못했다”며 “시골 지역 전초기지에서 시작된 전투에서 탈레반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은 너무 쉽게 항복했다”고 전했다. 미국이 20년간 아프간 군대의 무기와 장비, 훈련 등에 쏟아부은 돈은 830억달러(약 97조원)에 달한다. NYT는 “아프간 지도부는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이 이날 항복과 함께 해외로 도주한 게 하이라이트였다.
부패한 지도부 하에 있는 정부군의 사기 저하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아프간이 빨리 백기를 든 것은 군인들이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NYT가 전한 남부 대도시 칸다하르의 모습은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칸다하르는 미군의 지원을 두 번째로 많이 받은 도시였는데, 정작 아프간 군인들이 몇 주간 최전선에서 싸운 후 받은 건 하루 한 상자의 감자였다고 한다. 굶주림과 피로가 군인들을 지치게 한 것이다. 탈레반이 주요 도시에 사실상 ‘무혈입성’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아프간 정부군 병력의 상당수가 ‘유령 군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의 의회 제출 보고서를 보면, 지난 4월 기준 급료를 받는 아프간군(ANDSF)은 30만699명이다. 다만 실제 병력은 6분의1 수준인 5만명 정도였다. 부패한 군경 간부들이 장병 급여를 가로채기 위해 허위로 군인 수를 기재한 데다 수개월간 급여를 못 받은 아프간 장병들이 계속 탈영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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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대통령의 미군 철수 오판
또다른 요인은 미국의 오판이 꼽힌다.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결정 그 자체보다 속도와 방식, 대비책 등에서 문제가 컸다는 게 요지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도 이같은 판단 착오를 인정했다.
무엇보다 ‘비빌 언덕’이던 미군이 사라지자 아프간 군대 전체가 흔들렸다. BBC에 따르면 탈레반의 핵심 전투대원은 6만~7만명이다. 아프간 군대와 규모가 비슷했다. 그런데 탈레반을 추종하는 지역 무장단체 대원과 지지자까지 포함하면 약 20만명으로 추정된다. 유령 군인을 제외한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에 열세였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까지 사라졌으니, 아프간 정부군은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였다.
아프간 특수부대의 한 장교는 “미군의 완전한 철수 결정 이후 변화를 봤다”며 “군 간부들은 의욕을 잃었고, 모두가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결국 미국이 우리를 실패하게 내버려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날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군 헬기를 통해 이뤄진 탈출 작전은 흡사 1975년 베트남전 패전 당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연상케 했다. 미국 전쟁사의 또다른 치욕이라는 관측이다. 베트남전 패망 당시 미국은 이 작전을 통해 헬기를 미국 대사관 등에 띄워 사람들을 탈출시켰다. AP는 “아프간전이 베트남전을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끝날 것이라는 우려를 바이든 대통령이 무시하면서 나온 장면”이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리더십은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미국의 귀환’을 기치로 내걸고 국제사회 리더십 재건을 선언했지만, 아프간 철수와 이후 상황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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