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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뛴다)②결실맺는 `일본式 구조조정`

김경인 기자I 2006.09.13 13:59:13
[이데일리 김경인기자] "일본은 마침내 긍정적인 의미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준비가 됐다. 태양은 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s)"

일본 경제가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80년대말 일본 경제의 거품 붕괴를 정확히 예견해 유명해진 이가 있다. `태양은 다시 진다`(The Sun also sets)`라는 저서로 명성을 날린 빌 에모트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은 지난해 10월 일본의 화려한 부활을 한발 앞서 짚어내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일본경제의 부활을 주제로 쓴 책 `태양은 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는 올초 일본에서 출간돼 큰 인기를 누리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에모트는 일본 경제의 부활이 느리지만 꾸준히 진행된 `일본식 개혁`에서 잉태됐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조정과 타협이라는 상식을 깨고 `개혁`을 밀어부쳐 정치 도박은 물론 경제회생에도 성공한 고이즈미 총리에게도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일본 경제를 회생시킨 지루한 구조조정은 금융부실의 청소에서부터 출발했다.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정책적 지원뿐만 아니라 수출과 첨단기술 육성을 위한 노력을 병행했고, 기업은 비교우위에 집중 투자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경쟁력 제고에 적극 나서왔다.

◇금융부실의 청산..버블 붕괴의 시작과 끝

일본 은행들은 90년대 부동산 버블 붕괴의 직격탄을 맞았다. 대출 담보로 잡은 주택 등의 가치가 급락한데다, 경제가 위축되고 BOJ가 뒤늦게 금리까지 올리면서 신규 대출 수요가 크게 줄어 졸지에 부실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1995년 12월 주택금융전문회사(주센) 8사중 7사가 경영난으로 파산하면서 금융업계의 부실이 공론화됐고, 1997년 11월에만 산요 증권, 홋카이도 척식은행, 야마이치 증권, 도쿠시마 시티은행 등 네 곳이 폐업했다.

기업들도 사정은 같았다. 버블이 컸던만큼 붕괴에 따른 충격이 컸고 대기업들의 부실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파산시 채권사들의 연쇄부도나 국가 금융위기가 우려되는 데다 공격적 구조조정을 단행하기엔 대규모 실업에 따른 `소비급랭`도 고민거리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등 전 총리들은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업계를 회생시키려 했다. 류타로 정권이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했으며, 금융산업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재정 지출을 늘리는 등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일례로 정부는 1998년말 신세이은행과 오코라은행을 일시 국유화해 억지로 회생시켰으며, 1999년에는 15개 은행에 무려 7조엔 이상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하지만 공적자금 중심의 정부 주도 개혁은 납세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국민들은 개혁에 반발했고, 이후 개혁의 예봉은 점점 무뎌져 갔다.

◇구조조정의 전환점..고이즈미의 개혁 기치 

일본의 개혁과 구조조정 작업은 고이즈미 내각이 들어서면서 탄력을 받게 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금융청의 분리·독립, 산업재생기구 설치 등을 통해 금융부실에 본격적으로 메스를 댔다.

정부의 회생작업은 2003년 산업재생기구의 탄생으로 일대 전환을 맞게 됐다. 그 해 4월에 출범한 산업재생기구는 정부와 대형 은행들이 출자한 주식회사로 은행들의 부실채권을 해결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산업재생기구는 회생 가능한 부실기업을 선정해 주요 채권은행들과 함께 채권을 모두 사들인다. 이후 만기연장, 대출금 삭감 등을 통해 빚을 덜어내고, 다른 출자자를 모집해 부실기업의 재건을 책임지게 한다. `부실공룡`인 거대 유통사 다이에나 화장품업체 가네보 등이 현재 이같은 회생과정을 밟고 있다.

특히 재생기구가 기업회생을 통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없는 경우 상당부분 정부가 책임을 지기로 약조,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부실기업을 회생시킨 셈이다. 이로 인해 많은 비난도 받았지만, 체계적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인점 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일본 정부는 수출을 중심으로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국제금융시장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시장개입에 나서는 등 집요한 엔고 저지노력을 펼치며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민간 부문의 창업을 지원하고 차세대 성장산업을 육성하는 등 경제활성화 노력도 병행함으로써 개혁의 연착륙에도 배려를 기울였다.

◇다시 주목받는 `일본식 구조조정`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던 일본 기업들의 경영개혁은 글로벌 비즈니스 부문에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지난달 일본 기업 회생의 원동력을 `하이브리드(혼합) 경영방식`이라고 진단했다.

대규모 해고와 임금삭감을 기본으로 하는 미국식 구조조정과 달리 일본 기업들은 전통을 유지하면서 `느리고 꾸준한`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평생직장`과 `주주경영`을 통해 해고를 최소화하고 보너스 삭감과 업무 구조조정 등을 통해 효율을 높였다. 이 같은 회생작업이 있었기에 경제 회복기에 소비지출이 적극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고, 기업과 소비, 즉 내수가 이끄는 일본식 경제 회생이 가능해졌다.

2004년 하반기 일본 경기회복의 싹이 보이기 시작하자 해외에서는 정부의 대규모 투자가 아니라 민간 주도로 경기회복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이 단순히 채산성을 개선하는 수준이 아니라 경영체질을 바꿔 장기적인 수익성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부가가치 제품과 첨단기술의 개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본식 구조조정의 성과는 잘나가는 도요타와 쓰러져가는 GM·포드의 사례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도요타는 근로자들을  투자개념으로 인식, 노사협력을 통해 신기술을 개발했고 하이브리드카는 북미 시장에서 `빅 히트`를 쳤다. `해고는 없다`는 도요타의 경영철학과 달리 GM과 포드는 근로자들을 `비용`으로 보고 어려울 때 마다 인력에 손을 댔다. 감원이 진행중인 GM에 이어 포드는 13일 관리직 화이트칼라까지 잘라 비용을 최대 30%까지 줄이겠다고 밝혔다.

미국 기업들의 주주이익 극대화 논리는 주주·경영진과 종업원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실업증가 등의 다양한 문제점을 불러왔다. 경제의 부활과 함께 일본식 구조조정과 경영기법에 다시 화두로 등장한 것은 이같은 배경을 근거하고 있다.

◇아베 내각의 출범..일본식 개혁 이어질까?

일각에서는 아베 내각 출범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뒤이어 일본 총리가 되면 엔화가 약
세를 보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아베가 자민당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고이즈미의 개혁정책의 속도를 늦출 것이란 판단이 그 이유다.

하지만 아베도 정책의 중심을 `성장`에 두고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을 적극 지원해 양극화를 해소하고, 기술혁신과 시장개방을 통해 고도성장의 자양분을 마련하겠다는 복안이다.

기업의 기술혁신 지원을 위한 감세정책도 준비중이다. 어렵사리 되살아난 불씨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다시 한번 경제대국의 위상을 도모하겠다는 복안이다.

오랜 어둠끝에 다시 떠오른 해가 중천으로 향할지, 서산으로 향할지는 새로운 선장이 일본호를 어떻게 운항해 나갈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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