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산업은행 자금기획부 김계동 시장조달팀장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산금채 발행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신 건 언제입니까.
▲95년 1월입니다. 제가 처음에는 예수금 담당 차장직을 맡았어요. 예수금을 실제로 관리하면서 “예수금은 왜 요 모양일까”라는 생각을 했죠(웃음). 당시만 해도 총액이 1조가 안됐어요.
쉽게 말해 산업은행의 예금을 담당한 것인데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98년 이전에는 “자금을 공급한 사업체에서만 예금수취가 가능하다”고 규정에 명시돼 있었습니다. 지금도 당좌, 별단예금은 여신거래처에서만 수취가능한 상태고요. 여간 이런 규제가 98년 8월 풀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일반인 예금이 가능해졌습니다.
"수신업무 활성화 마스터플랜" 하에서 일반인과 관계된 상품개발에 주력했습니다. CD발행, 폰뱅킹 및 PC뱅킹 실행, 통장식 산업금융 채권개발, 고객정보관리 시스템 구축 등의 일을 담당했구요. 대부분 소매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하는 노력들이죠. 시중은행 관계자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꺾기 관행을 넘어 시장발행으로>
-95년 산금채 발행 당시 채권시장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그 당시는 거래기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때는 일반기업에 대한 꺾기(구속성예금, 은행이 대출을 할 때 일정한 금액을 강제로 예금토록 하는 것. 어음할인이나 자금대출을 조건으로 기업에 일정액의 예금개설을 요구하여 이 돈은 해당 융자금을 갚을 때만 쓸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보통)가 일반적인 시절이니까요. 주로 거래기업에 산금채를 팔았죠. 그렇지만 국채가 등장하기 이전이라 산금채는 시장에서 벤치마크의 역할을 했습니다.
-자금조달팀으로 오셨을 때가 산업은행이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제도를 막 시도하려는 찰나였군요.
▲시중은행에서 기업금융과 장기대출을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금융이 고도화라고 표현하기는 뭣하고…하여간 선진화한 방향으로 나가는 과도기적 시점이랄까요. 자연스럽게 국책은행과 일반은행의 구분이 불분명해졌고 산업은행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꺾기와 관련한 결정적인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IBRD 자문관들이 진주하게 됐습니다. 저희 은행에도 물론 왔고요. 좋게 말하면 국내금융시장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유도한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금융시장이 워낙 폐쇄적이고 변화속도도 늦었으니까요. 채권시장을 중심으로 보면 국채발행이 상당한 의미를 가집니다. 시장 벤치마크가 생긴 거잖아요.
외환위기 전에는 정부가 국채발행을 재정건전화, 예산균형 등의 이유를 들어 직접발행을 피해왔었습니다. 그러나 환란 후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서 국채발행이 불가피해졌고 국제개발은행 측에서도 그것을 요구했어요. 그 후 채권시장의 볼륨이 놀랄만큼 확대됐습니다. 그러면서 장기채권 시장도 발전하기 시작했죠. 채권시장의 모양이 갖춰져 가면서 저희도 시장수요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꺾기 방식으로 산금채를 발행해도 결국 기관투자가들이 다시 그 산금채를 사니까 이런저런 폐해가 있었습니다. 꺽기를 하게 되면 덤핑성 급매물로 시장출회가 되잖습니까. 이는 금리를 왜곡시키는 현상으로 이어졌죠. 결과적으로는 발행비용을 올리는 결과를 낳았고 민원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감독당국에는 “구속성예금 지도기준”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기준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왜곡된 현상을 탈피해보자. 불합리한 점을 해소하고 시장 메커니즘에 의한 조달방식을 사용할 시기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과거에 꺾기가 횡횡했던 것은 매니지먼트 시스템이라던가 담당자들이 꺾기가 산금채 매출에서 일종의 안전판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제가 입행하기 전부터 오랜 관행으로 이어져온 탓에 전환할 엄두를 못낸 거죠.
-그런 식으로 완전한 환골탈태를 이루신 것이 언제입니까?
▲99년입니다. 그런 관행이 모두 사라졌어요. 96년부터 자신감을 가져서 꺾기를 없애자는 분위기가 확산됐습니다. 그러한 노력을 시도하면서 비중을 조절해나갔죠. 97년에는 시장에 의한 조달이 50%를 넘게 됐고 마침내 99년에 꺾기 제도가 완전히 사라진 거에요.
-관행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도를 처음하신건데 어찌보면 전례가 없었으니까 무척 막막하셨을 것 같습니다. “일반고객들에게 산금채를 팔아라” 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니까요. 특히 산금채 판매와 관련해서 어떠한 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했는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저희는 연기금, 보험, 투신과 같은 투자기관과는 직접 접촉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물론 간간히 접촉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만. 주로 증권사를 통해 시장발행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고 시장동향도 파악했습니다. 또 시장친화적인 발행시스템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에서 몇 가지 제도개선도 했습니다.
<시장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제도를 바꿨다>
-그러한 아이디어를 만들 때 참고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산금채 만기 매칭 아이디어는 현재 부국증권 팀장으로 있는 안노영씨가 모멘텀을 제공해줬어요. 당시 국민은행 신탁에서 근무하고 있었죠. 저는 ‘과거제도에 매달려서 시장요구를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시장이 필요로 한다면 제도도 거기에 맞춰나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편집자주: 산금채는 매월 26일로 발행일이 고정돼 있다. 채권시장 상황에 따라 발행일을 임의로 조절할 수 없어서 시장참가자들의 불편이 많았다. 그래서 일종의 통합발행 개념으로 그때그때 시장상황에 따라 산금채를 당일 매출하지만 만기는 26일 발행일을 기준으로 통일하는 기법이 고안된 것이다.)
-아이디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결제를 받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텐데요.(웃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웃음) 당시 모신 상사분들이 물론 채권이론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셨지만 부하직원이 하는 일에 별로 간섭하지 않으시고 밀어주셨어요.
-아이디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고생고생해서 기안을 만들고 올라가니 윗분이 무슨 말인지 몰라주신다거나 하는 일 말입니다. 하하
▲증권예탁과 관련된 일이 기억납니다. 당시는 증권예탁 데이터베이스와 관련된 업무가 재무부의 지침으로 강조만 되는 상황이었지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거든요. 편의성, 신속성을 보강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희기 무권발행을 선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죠.
-산금채를 국고채와 같은 경쟁입찰 방식으로 발행하시려고 몇차례 시도하셨는데 잘 안된 것 같습니다.
▲저희 팀의 입장은 경쟁입찰이 발행채널 방법 중 하나로 정착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쟁입찰 정착의 필요성을 인식한 거죠. 그렇지만 1차로 99년에 시도했을 때는 시장이 정말로 좋지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지난해에는 flight to quality(안전자산 선호현상)이 지나치게 심화됐어요. 산금채가 1회 입찰에서 발행할 수 있는 물량으로는 딜링하는데는 부족해서 한계에 부딪힌거에요. 시장관심도 산금채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습니다.
사실 2차례 모두 실무진에서는 “여러가지 변수들과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한 결과 실패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시행은 해봐야된다는 입장이었죠.
<통장식 산금채 개발업무가 가장 인상적>
-산금채 발행과 관련해서 가장 힘든 적은 언제였습니까.
▲98년 ‘수신업무 활성화 마스터 플랜’ 하에 통장식 산금채 개발업무를 맡았습니다. 현 론스타코리아 회장이신 심광수 이사가 지휘를 하셨구요. 당시 창구에서 채권을 사게 되면 투자자가 발행문의를 하게 됩니다. 발행금리는 통상 시장금리와 50bp의 갭을 유지했는데 시장변동성 흡수를 위한 것이었죠. 그런데 증권사에서 채권을 산 투자자들은 유통금리와 산은발행금리 중간 선에서 구입할 수 있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증권사에 가면 산은 창구에서보다 오히려 더 싸게 살 수 있단 말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심광수 이사께서는 이건 불합리하다는 인식 하에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셨어요. “채권이라는 것은 예금과 달라서 네고도 가능하지 않다. 어떻게 한 채권이 두 가지 가격을 가질 수 있느냐.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몇 달을 끌면서 고민하던 차에 통장식 산업금융채권을 만들었어요. “현물로 주지않고 통장으로 거래를 하는 대신 창구에서 현물로 사는 금리보다는 우대해준다” 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다만 통장으로 산금채를 사는 고객이 현물을 시장에 유통시켜 환급받을 때는 발행당시의 현물금리를 부과하겠다는 약관을 덧붙여서요.
98년 10월에 처음 발매가 됐는데 당시에는 금리절대수준이 높았고 2000만원 한도내의 소액채권에 대한 세금우대 조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고객들의 반응도 좋았어요. 일년동안 1조 정도 팔렸으니까요. 지금은 워낙 절대금리가 낮아져서 그 당시만큼의 반응은 없지만 하여간 그 때는 무척 뿌듯했습니다. 사실 지금 지나고보면 별 것도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틀을 깨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던지..허허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