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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흘림골 등선대에서 만난 산악인은 “여기가 설악산의 모든 절경을 모아둔 곳이잖아요”라고 했다. 그는 미국인 리 모어와 등산 중이었다.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리는 휴가차 한국을 찾아 최고봉인 설악 대청봉을 한 번 오르고 싶어했지만 북상한 태풍으로 등반금지조치가 내려져 실망하고 있던 차였다. 이 때 한국 산악인이 “흘림골이 좋다”고 해서 따라왔단다. 이슬비에 온 몸이 젖어있었던 리는 설악산 단풍을 보고 “베리 뷰티풀”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등선대는 해발 1014m. 단풍철이면 공룡의 이빨 같은 하얀 기암에 단풍들이 다닥다닥 붙는다. 파충류 등에 빳빳하게 솟은 볏처럼 생긴 능선 너머로 한계령 휴게소, 그 뒷자락에 있는 서북능선도 빤히 보인다. 정상의 장대한 풍경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흘림골에서 주전골로 내려가는 등산로에는 십이담계곡이 있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열두굽이 흘러흘러 내리는 물줄기다. 흘림골은 주전골을 거쳐 오색약수로 빠진다. 탐방로는 계곡을 이리 저리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게 돼있다. 여기저기 눈길 줄 곳이 많다. 이런 산길에서 고개를 들면 기암들이 기가 막히다. 00바위, XX바위라고 부를 만한 봉우리들이 고개를 쳐들고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게다가 여심폭포 같은 기암도 있다. 여심(女深)은 여자의 마음이 아니라 몸을 닮은 바위다. 30년 전엔 신혼부부들이 물을 받아 마시며 득남을 기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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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현재 단풍은 600m 고지까지 내려온 상태다. 이번 주말에는 정상 등선대 단풍은 대부분 지고, 십이담계곡과 오색까지 단풍이 물들 것으로 예상된다.
흘림골 단풍은 산행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올해 신종플루의 영향으로 탐방객이 줄긴 했다지만 지난해까지만해도 성수기 주말엔 설악산은 산이 아니라 도심이다. (주말 북한산도 그렇지만)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올라가기 십상이다. 단풍철에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보는 색은 검정(등산복)이다. 주요 탐방로는 마치 지하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처럼 붐빈다. 등산객은 줄지어 돌덩이를 오르는 ‘황색 개미’이고, 단풍 산행은 마치 설악산 인간띠 잇기 퍼포먼스처럼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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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기 단풍산행에선 불쾌한 경험도 할 수 있다. 탐방로가 밀린다고 밀쳐대는 사람도 있고, 술 냄새 풍기며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탐방객도 있다. 인상 찌푸리지 말고 인사라도 나누자. 단풍은 짧고 인생은 길다.
길잡이
*흘림골 입구는 한계령 휴게소 넘어 양양 방향으로 3~4㎞ 내려오면 오른쪽에 자그마한 탐방안내소가 보인다. (가평 현리로 들어가는 길을 무시하고 양양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된다.) 주차장은 따로 없는데 단풍철엔 줄지어 갓길 주차를 한다. 갓길 주차가 수백m 이어진다.
*오전 10~12시는 피하자.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린다.
*흘림골~오색약수 택시비는 2만5000원. 양양 콜택시회사(033-671-2300).
오색 약수터 앞의 식당가에서 식당주인에게 흘림골 입구까지 태워달라고 하면 등산객의 차로 흘림골 입구까지 태워주는 사람도 있다.
*오색 그린야드 호텔(033-670-1002)은 등산객이 많을 경우 투숙객을 오전 8시40분 흘림골 입구까지 태워다준다. 2인실은 주중 9만원, 4인실은 14만4000원, 주말 2인실 10만5000원, 4인실 16만8000원. 호텔 찜질방은 올해부터 24시간 운영한다. 다만 오후 10시 이전에 와야 한다. 1만원. 찜질방 손님은 흘림골 입구까지는 안 바래다준다. (좌석이 남으면 태워주는 경우도 있다.)
*한계령에서 양양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오색지구 입구도 지나면) 범부리가 나온다. 마을로 우회전해서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범부막국수(033-671-0743)가 있다.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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