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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작열하는 태양같이 강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졌다. 폭발하는 에너지도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화가 최욱경(1940∼1985)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작 마흔다섯 살. ‘무무당’(無無堂)이라 이름 붙인 작업실에서 맞은 갑작스럽고 이른 죽음이었다. 황망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준비한 장례식장에는 흑장미로 덮인 관이 놓였다. 자신이 죽으면 장미를 놓아 달라고 흘린 그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됐다. 1985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후 최욱경은 줄곧 ‘요절한 비운의 독신 여류화가’라고 불리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진부하고 자극적인 단어로만 박제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최욱경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화가였다. 어릴 때부터 미술이 천직이라 믿었고, 다시 태어나도 그림을 그릴 거라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여섯 시간은 반드시 그림을 그렸다. 155㎝ 43kg 체구의 맨발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5m에 육박하는 그림에 몰두할 때면 마치 활화산 같았다. 맥주와 담배, 커피를 들이부어가며 작품을 몰아쳤고 “한 줌의 흙으로 변할 때까지 나는 이 길을 쉬지 않고 가리라”고 다짐했다.
◇한국서 엘리트 코스 밟은 뒤 미국행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욱경은 또래에 비해 꽤 특별한 행보를 밟았다.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 스물셋이던 1963년. 선진교육에 대한 갈망 때문은 아니었다. 미술에 재능과 관심을 보이는 딸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려는 부모 덕분에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미술계의 엘리트 코스를 차곡차곡 밟아온 터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어머니 손을 잡고 한국화 대가인 김기창·박래현의 부부 화실에 등록한 것을 시작으로 이화여중, 서울예고, 서울대 미대를 거치며 한국미술사 거장들의 제자가 됐다. 그럼에도 더 큰 세계에 대한 욕구와 변화에 대한 열망이 일었다. 그래서 떠난 거다. 당시 미술의 메카였던 미국으로. 언제나처럼 당찬 발걸음으로.
미국시절 최욱경의 작업은 스펙트럼이 넓다. 소묘력이 돋보이는 사실적인 드로잉,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서린 흑백의 구상회화, 강렬한 색을 처바른 커다란 추상미술까지 망라한다. 재료도 여러가지다. 캔버스에 문자를 넣고, 신문·잡지를 붙이는 콜라주를 제작하며, 입체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시집도 출간했다. 미국의 인권운동, 히피문화, 반전운동에도 관심을 표했다. 미국 각지의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며 현지 미술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마치 그 땅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달려드는 듯했다.
하지만 백인남성이 중심인 미국미술계를 아시아 여성이 뚫기는 녹록지 않았다. 작품만 보고 노련한 40대 남성화가의 것이려니 생각했던 미국인들은 최욱경을 직접 만나고는 “조그만 동양 여자가!”라며 놀라곤 했다. 당시 미국에서 빈번히 열리던 추상회화 단체전에는 한 차례도 초대받지 못했다. 물론 최욱경만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인 여성화가들의 처지도 비슷했다. 최욱경은 종종 “미국사회에서도 외국인과 여성을 차별하는데, 남녀를 구별하는 건 싫은 일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고, 작품 귀퉁이에 “때가 되면 해가 뜰까, 과연 내게 때가 오긴 할까”라고 끄적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던 최욱경이 한국으로 향한 것은 1971년. 첫 고국 개인전을 위해서였다. 1000점이 넘는 작품 중 30여 점을 선별해 들고 온 9년 만의 귀국길이었다. 당시 국내 화단의 화두는 전통문화였다. 정부는 전통문화 관련 전시나 문화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며 전통유물·유적 전시가 열렸고, 1972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개관했다. 이런 분위기에 과연 최욱경의 작품은 어떤 평을 들었을까. 싸늘했다. “미국 체취가 너무 강하다”는 보통이고 심지어 “버터냄새가 진동한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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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는 최욱경을 두고 평단은 “고독하고 내성적이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고, “부드러운 대인관계를 지속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글쎄. 1970년대 초반, 우리 미술계는 과연 얼마나 포용적이었던가. 학연·지연의 파벌이 지배하던 그때 요란한 색채로 대작을 과감히 그려대는, 미국물까지 잔뜩 먹은 젊은 여성을 용납할 여유가 얼마나 있었을까.
◇200여 색으로 가득 채운 벽화만한 화면
끊임없이 기회를 찾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최욱경이었기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에너지 가득한 초대형 회화다. 200여 개의 색을 사용해 벽화만한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최욱경은 ‘미처 못 끝낸 이야기’라는 작품명을 붙였다. 여전히 그리고 싶은 것, 날아오르고 싶은 세계가 남아있다는 뜻이었으리라. 1970년대, 아니 그 이후에도 어떤 우리 작가가 그렇게 거침없이, 이토록 다채로운 색으로, 이만큼 커다란 그림을 그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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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85세다. 세상이 달라져 오래도록 비주류였던 여성미술가에게 전례 없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시대다. 작은 거인 최욱경이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을까. 미국이든 한국이든 재료와 기법을 다 포용하며 실험했던 최욱경.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씩씩하게 세상을 누비던 용감한 화가. 한국미술사에서는 보기 드문, 밝은 기운이 요동치는 압도적인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던 최욱경을 담기에 그 시대는 너무 작았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