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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196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대규모 공안사건을 발표한 것이다. 독일·프랑스로 건너간 유학생·학자·예술가·교민 등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내용. 바로 ‘동백림사건’이다. 194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잡혀들어왔고 그중에는 화가 이응노(1904∼1989)가 있었다.
1958년부터 프랑스에 살고 있던 이응노는 동베를린에 가면 한국전쟁 때 잃어버린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는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있을 때지만, 동독 방문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던 터다. 이응노는 아들을 본다는 희망을 안고 동베를린으로 갔으나 결국 헛걸음만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짧은 방문이 이응노를 ‘동백림사건’에 휘말리게 했다. 대남 적화공작을 벌였다는 간첩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1967년 6월 21일, 이응노는 김포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환됐고,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이송돼 조사를 받았다.
이 소식에 세계에 흩어져 있던 예술인들이 움직였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미국의 화가들과 국제미술평론가협회, 컬렉터 단체, 미술관, 가톨릭교회 등이 탄원서와 변호사 선임비용을 보냈다. 검찰이 구형한 형량은 무기징역이었지만,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형을 확정받았다. 이후 이응노는 2년 6개월여 만에 형집행정지 및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1969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하지만 타계할 때까지 다신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후 폐허 재건 일꾼, 하루벌이 노동자…‘약자’ 향한 관심
이 사건을 계기로 이응노가 억압된 자유에 대해 깊이 생각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념 갈등에 의한 분열이 한 나라와 가족, 개인에게 미치는 파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유·평화·화합을 부르짖는 군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던 중 1980년 고국에서 날아온 5·18민주화운동 소식을 들었을 때 이응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길로 붓을 들고 삶의 마지막 작품 시리즈를 시작했다. ‘군상’이었다.
그 연작 중 한 점인 ‘군상’(1986)은 가로 270㎝, 세로 211㎝에 달하는 대작이다. 여든 둘의 노화가는 이 거대한 화면을 오직 먹만 사용해 사람의 형상으로 채웠다. 이만큼 큰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라니. 도대체 몇 명이나 될지 어림조차 되지 않는다.
인물 하나하나는 고도로 단순화된 모양이다. ‘나도 그릴 수 있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인간 형상으로 3m에 육박하는 빈 공간을 압도할 수 있겠는가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게다가 그 많은 사람 모두가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손을 들고 춤을 추며, 이쪽저쪽으로 뛰어오른다. 인물의 밀집도도 다르다. 화면의 중심부에서 정점을 이루고, 군데군데에서 이합집산을 반복한다. 먹의 농담 역시 변주를 보인다. 화면의 중심이 가장 진하고, 주변으로 갈수록 연해진다. 리듬감 있는 이 요소들 덕분에 화면에 역동감이 생기고, 소리의 울림이 만들어진다. 종국에 그림 속에서 울리는 발 구르는 소리, 손뼉소리, 함성소리는 화면을 넘어 관람자의 귀에 닿는다. 단순한 형상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조형적인 요소들을 노련하게 운용한 결과다.
‘군상’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이응노 자신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지만, 유럽 사람들은 ‘군상’ 시리즈를 반핵운동, 다시 말해 평화를 향한 외침으로 해석했다. 화가는 이 역시 긍정했다. 그림 자체가 인물이나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은 덕분에 유연하게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다. 자유·평화·화합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군중의 모습이라면, 어떻게 읽어도 틀리지 않다.
‘군상’ 시리즈는 1980년을 기점으로 시작했지만, 이응노의 작품 여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훨씬 이전부터 자리했음을 볼 수 있다. 1946년에는 3·1운동을 하는 군중을, 한국전쟁 때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 무리를 그린 바 있다. 전쟁 후에는 폐허를 재건하는 일꾼들, 하루의 벌이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 거리의 악사와 꽃장수, 술 한잔에 시름을 달래는 서민들을 수차례 그렸다. 아무 특별할 것 없는, 곤궁한 현실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권력 있는 사람보다 약한 사람, 모여 살아가는 사람, 일하는 사람에 마음이 간다”는 이응노가 선택한 그림의 주인공들이 그랬다. 아마 그가 동시대를 살았다면 이른 새벽 만원버스에 몸을 싣고 출근하는 직장인들, 아침부터 밤까지 가게를 지키는 소상공인들, 트럭 가득 물건을 싣고 바삐 나르는 택배기사들을 그리지 않았을까.
◇인간 형상 군더더기 제거…‘집단의 역동적 기운’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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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이룬 이러한 회화적 성취는 점점 더 추상으로 나아갔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마침내 1980년대 ‘군상’에서 다시 발현했다. 이응노는 이미 30년 전에 그러했듯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채 그들이 집단으로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집중했다. 작품의 목적이 사람들의 생김생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힘을 표현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 하나하나의 다름 대신 하나의 화면을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춘 덕분에, 작품이 가진 메시지도 또렷해진다. 자유와 평화라는 가치를 위해서만큼은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조금씩 양보하고 함께 화합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그림은 벽에 걸어두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그림은 핏기 용솟음치는 발언”이라고 한 이응노가 생의 마지막에 전한 메시지였다.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빈번히 일어나는 요즘, 그들이 외치는 함성이 이응노의 ‘군상’에 자주 겹쳐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소리를 높이고 있나. 우리의 함성은 얼마나 화합하고 있는가. 재판정에서 우리 모두는 같은 민족이 아니냐며 꺼이꺼이 울던 이응노의 ‘군상’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