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결성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항일 운동을 펼친 인물들이다. 권업회는 일제 탄압을 피하기 위해 ‘한인에게 실업을 장려한다’는 뜻의 경제단체로 창립됐으나, 실제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을 결집해 ‘조국독립’을 최고의 이념으로 한 항일구국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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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의 창립과 권업신문 발간에 공헌한 이종호 선생은 고종의 측근인 이용익의 손자다. 이 선생은 1906년 10월 서울에서 애국계몽단체인 한북흥학회를 조직했고, 서북학회의 서북협성학교 설립 초기 재정을 전담했으며, 교장을 맡아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일제감시망에 포착돼 위험인물로 분류됐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배후 인물로 지목, 원산에서 체포돼 3개월 넘게 수감조사를 받고 석방됐으며, 이후 권업회의 조직과 ‘권업신문’ 발간에 가장 중요한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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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 창립과 ‘권업신문’ 발간을 후원한 최봉준 선생은 부모를 따라 8세에 한인 최초 이주지인 연해주 일대의 지신허에 정착했고, 이후 두만강변 근처 촌락을 개척하고 마을 대표로 추대됐다. 선생은 함경도 일대의 소를 러시아 군대에 수출하는 무역으로 자본가로 성장해 많은 재산을 모아 조국독립에 재정적 후원을 했다.
1908년 러시아 한인사회에 간행된 최초 신문인 ‘해조신문’과 ‘권업신문’ 창간의 재정적 지원은 물론 ‘계동학교’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지원을 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한인 자치기관인 고려중앙총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청구신보’를 창간하는데도 힘을 보탰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종호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학만 선생에게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최봉준 선생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