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8일(현지시간) 고(故)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의 정치적 삶을 이렇게 압축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가장 가까운 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동시에 대통령이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상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인이었다는 의미다. NYT는 그레이엄을 백악관과 상원을 잇는 ‘정치적 가교(bridge)’로 규정하며, 그의 죽음으로 워싱턴 권력의 균형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레이엄은 단순한 친(親)트럼프 인사가 아니었다. 워싱턴에서는 오히려 그를 ‘트럼프의 통역사(Translator)’ 또는 ‘트럼프 속삭임꾼(Trump whisperer)’으로 불렀다. 대통령에게는 상원이 왜 대통령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지를 설명했고, 상원의원들에게는 트럼프가 무엇을 원하는지 풀어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의회를 모두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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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상원을 답답해했다. 사업가 출신인 그는 결정을 내리면 조직이 곧바로 움직이는 방식에 익숙했다. 하지만 상원은 다르다. 토론과 협상, 절차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의원 개인의 권한도 강하다. 공화당이 다수당이라고 해서 대통령이 원하는 법안이 자동으로 통과되는 곳이 아니다.
그레이엄은 누구보다 이 차이를 잘 이해했다. 그는 대통령이 상원을 향해 불만을 쏟아낼 때마다 “왜 안 되는지”를 설명했고, 반대로 상원의원들에게는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하며 양측의 간극을 좁히려 했다. 텍사스주의 존 코닌 공화당 상원의원은 NYT에 “그레이엄은 트럼프의 통역사이자 중재자였고, 무엇보다 백악관과 상원을 잇는 다리였다”며 “그 다리가 이제 사라졌다”고 말했다.
골프장은 그레이엄의 또 다른 정치 무대였다. 그는 트럼프와 라운드를 함께하며 다른 공화당 의원들이 꺼리는 쓴소리도 거리낌 없이 했다. 코닌 의원은 “그레이엄은 대통령이 듣기 싫어하는 말도 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상원의원이었다”며 “트럼프는 사업가라 절차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없지만, 상원은 결국 절차를 통해 결과를 만드는 곳이라는 점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의 관계도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레이엄은 2015년 공화당 대선 경선에 직접 뛰어들어 트럼프를 강하게 비판했고, 트럼프 역시 그를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그러나 이후 관계를 회복한 두 사람은 정치적 동반자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거칠게 시작했지만 결국 그는 가족 같은 사람이 됐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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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이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상원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존 튠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향해 여름 휴회까지 반납하고 선거법 개정안과 예산안을 처리하라고 연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튠 원내대표는 “찬성표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사실상 대통령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백악관도 “대통령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오히려 튠 원내대표를 굳건히 지지하고 있다.
NYT는 이런 상황에서 그레이엄의 부재가 갖는 정치적 의미가 더욱 커졌다고 분석했다.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면서도 상원의 논리와 절차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정치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그레이엄이 살아 있었다면 트럼프와 상원 사이의 충돌을 일정 부분 조율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레이엄은 트럼프의 최측근이었지만 외교·안보 문제에서는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공화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점차 고립주의 성향을 강화하는 동안에도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제재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대표적인 매파였다. 민주당도 이런 점만큼은 인정했다. 팀 케인 민주당 상원의원은 NYT에 “그레이엄은 미국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많이 고민한 정치인이었다”며 “국내 정치보다 미국의 국제적 역할을 이야기하는 상원의원은 이제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레이엄이 생전 가장 공을 들인 입법 과제도 트럼프가 최근 밀어붙인 선거법 개정안이 아니라 러시아 제재 법안이었다. 상원은 그의 뜻을 이어 해당 법안 처리 절차에 착수할 예정이다.
워싱턴에는 지금도 트럼프와 가까운 공화당 정치인은 적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직언하면서도 신뢰를 잃지 않았고, 동시에 상원의 복잡한 문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인물은 드물다. NYT가 “트럼프는 그레이엄을 사랑했지만, 그레이엄이 사랑한 상원은 사랑하지 않았다”고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은 한 명의 중진 정치인의 퇴장을 넘어, 백악관과 상원 사이를 이어주던 마지막 정치적 연결고리가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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