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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외교문서 공개…7·7선언 주한미군 철수까지 고려했다

정다슬 기자I 2021.03.29 09:35:08

'한소 수교 등'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가능성 언급하기도
北김일성, '한소 수교' 움직임에 "사절단 전원 철수" 소련 위협
고르바초프 "과일은 익어야" 노 "내가 익었다 하면 맛있을 것" 응수도 눈길

1990년 6월 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나란히 서서 기자회견에 응하고 있다(사진=ktv캡처)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노태우 정부가 남북대화와 북방정책 추진을 공식화한 7·7선언의 장기목표로 주한미군 철수 등도 고려한 사실이 외교문서로 확인됐다.

외교부는 29일 이런 내용 등이 포함된 30년 경과 외교문서 2090권, 33만쪽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는 노태우 정부의 7·7선언부터 한국의 국제연합(유엔·UN) 가입 추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국교수립,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에서 열린 제1차 한-소 정상회담 등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노태우 정부는 88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와 남북한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1988년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6개 항으로 된 이 선언은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적극 추진 △남북교역 문호개방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남북 간의 대결외교 종결 △북한의 대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으로 이뤄졌다.

7·7선언 정책방향 세부사항 중
그 과정에서 정부는 ‘북괴’(北傀)라는 표현을 중단하고 ‘북한’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등 상호 비방을 중단하기로 했다. 또 경쟁적인 남북 외교대결을 지양하고 북한의 서방국가와의 접촉 및 수교 정상화는 물론 국제기구 가입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한반도의 전쟁재발 억제 장치로서 휴전협정의 전향적인 대체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종전선언 등을 고려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문제를 검토하고 자주국방 능력을 감안한 남북한간 군축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도 장기적 안보외교 과제로 제시됐다.

실제 1989년 4월 한-소 수교를 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던 당시 홍순영 제2차관보와 소련 극동문제연구소 학술지 편집장과의 면담에서 소련 측이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묻자 홍 차관보는 ‘한·소 수교 및 4강 교차 승인과 국제적 보장이 확보되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같은 논의가 국제정세 변화 속 심도깊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셈이다.

반면 체제 위협을 느낀 북한은 방어적인 태도로 임해왔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한국이 국제연합(유엔·UN)에 가입을 추진하던 당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유엔의 남북한 동시가입을 추진했는데 북한은 남북한이 유엔에 개별의석으로 가입하면 분단이 고착화하니 단일의석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한국에 대한 가입을 무작정 거부하던 북한은 태도를 바꿔 남북한이 문제에 대해 면밀히 논의하자고 나섰다. 이에 한국 측은 북한이 총리회담 시기를 12월 중순(1990년)으로 잡는 등 한국의 유엔 가입 신청을 미루기 위한 지연작전을 쓴다고 보기도 했다.

다만 한국이 유엔 가입을 공개지지하는 우호국들을 늘리고 소련과의 수교에도 성공, 중국 역시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적어지자 국제정세의 흐름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한은 1991년 5월 28일 단일 의석 가입을 포기하고 개별 의석으로 가입한다는 의사를 처음으로 발표했고, 7월 8일 가입 신청서를 유엔에 제출했다. 남한도 8월 5일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고 8월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제702호 결의로 남북한 동시 가입을 총회에 권고했다.

소련과의 수교를 위한 막전막후 역시 이번 외교문서에서 엿볼 수 있다.

1989년 1월 방한한 미구엘 스테클로프 소련 연방상의 고문은 코트라 측과 면담에서 김일성 주석이 소련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두고 소련 외무장관과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고 전했다. 김 주석이 1988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에게 ‘소련이 헝가리식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 사절단의 전원 철수’를 언급하며 위협했다는 것이다.

1989년 헝가리와 수교를 맺은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의 수교를 염두에 두고 1990년 한·소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적당한 계기를 찾고 있던 노태우 대통령은 4월 7일 미국 방문 계획(5월 말로 추진)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절호의 기회를 엿보게 됐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애초 6월 말로 예상됐던 방미 계획을 앞당겨 미소 정상회담을 위해 5월 30일 워싱턴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우리와의 대화나 접촉을 거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푸는 최상의 길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라며 ‘워싱턴에서의 한소 정상회담 추진’을 지시했다.

추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청와대 고위 비서진들이 온갖 통로로 고르바초프 대통령 측근과 접촉해 정상회담을 타진했지만, 긍정적인 회신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국내 정치 상황 등으로 노 대통령의 방미 계획마저 취소될 상황에 부닥쳤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포기하지 않고 막후채널을 통해 소련 측에 거듭 ‘제3국에서의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마침내 소련 측이 5월 중순 ‘6월 4일 회동하자’고 동의했다.

제1회 한-소 정상회담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명 아래 극비리에 추진됐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는 한소 정상회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고르바초프 대통령 자신과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언급이 있다. 당시 소련은 주미 소련 총영사관을 회담 장소로 선호했지만, 우리 측의 요청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묵고 있던 페어몬트 호텔로 확정됐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경제 개발 모델의 적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며 상품 수출과 합작투자, 생산기술 분야 등에서 소련에 협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 역시 긍정적인 화답을 하는 가운데, “과일은 익어야 제맛이 날 것”이라고 하자 노 대통령이 “나는 잘 기다리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내가 익었다고 할 때는 맛이 있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이에 고르바초프 대통령 역시 “시간 낭비는 말자는 말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이후 한소 수교 역시 급물살을 탔는데 1990년 9월 30일 열린 외교장관 회담에서 러시아는 당초 1991년 1월 1일부터 수교하자는 입장을 바꾸어, 한국 측의 주장대로 수교일을 당일로 변경했다. 당초 소련이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까지 검토했던 우리 측이 이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셰바르드나제 외교장관은 즉시 공동성명문을 달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직접 1991년 1월 1일자로 돼 있는 수교 일자를 1990년 9월 30일로 정정하고 바로 서명까지 하려고 했다. 이에 배석자들이 서명은 회담 후 기자들 앞에서 하기로 돼 있다고 만류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공개된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 및 도서관 등에 배포되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문은 외교사료관을 방문해 확인할 수 있다. 외교부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총 28차 걸쳐서 3만여권(약 424만쪽)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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