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만 해도 보기 쉽지 않던 외국인 관광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진에 익숙한 일본인을 비롯해,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미국, 독일,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지진에 멍든 경주를 위로했다. 한산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유명 관광지는 국내외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강진 이겨낸 신라의 건축기술
가이드는 수다스러웠고 분주했다. 경주 토박이라는 그는 지진에 상처입은 유산 앞에 설 때마다 안타까워했고, 진도 5.8의 강진을 버텨낸 천년 건축물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랭이 기법이라는 게 있어요. 자연석을 이리저리 짜맞추고 그 위에 석축을 쌓아 건물을 올리는 건데요. 땅이 흔들려도 돌이 상하좌우로 움직이면서 충격을 흡수해요. 거기다가 석축에 동틀돌까지 박아놨으니. 신라시대에 저번 지진보다 더 큰 지진이 나서 수백명이 죽었을 때도 불국사는 까딱 없었지요.”
경주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지반이 불안정하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부산에서 울진으로 이어지는 양산단층은 언제 지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활성단층이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인 혜공왕 15년(779년)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사망자 100여명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당시 피해 상황 등을 근거로 규모 6.0이상, 진도 8이상의 강진이 경주 일대를 덮친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는 지진 중에선 가장 강력한 지진이다.
불국사는 신라법흥왕 15년(528년) 처음 지어졌지만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년)에 크게 중수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불국사에는 8세기 신라인들의 과학기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얘기다.
역사학자와 건축학 전공자들은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등 1300년전 신라인들이 건축물에 적용한 내진설계는 지금도 본받을 만하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인 게 그랭이 기법과 석축 안쪽에 쌓은 석재들이 흔들리지 않게 규칙적으로 박아둔 동틀돌이다. 불국사 백운교에 적용한 ‘△▽’ 형태로 맞물리게 쌓은 이중 아치 구조물 또한 신라인들이 불국사 등에 적용한 내진설계다.
석굴암(국보 24호) 또한 건재했다. 진입로 곳곳에 설치된 ‘낙석주의’ 푯말과 무너진 산허리만이 지진의 흔적을 보여줄 뿐 석굴암 본존불은 여전히 유리벽에 안에서 관광객과 참배객들을 맞았다. 다보탑(국보 20호)은 상중부 난간석이 떨어져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파손돼 후대에 접합했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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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태풍 말라카스가 몰고 온 비구름 탓에 종일 비가 내린 17일 첨성대(국보 31호)를 찾았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첨성대는 지난 12일 지진으로 북쪽으로 2cm 가량 더 기울고 최상단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자석도 남동 측 모서리가 약 5cm 가량 더 벌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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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는 기단부 아래 4~5미터 깊이로 땅을 파고 난후 흙과 돌을 번갈아 채워 땅을 단단히 다졌다. 또한 화강암 벽돌을 엇갈려 쌓아 올린 뒤 창 아래 내부에 자갈과 흙을 단단히 채워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을 1300여년 전에 실천한 건축물이다. 눈에 띄는 것은 기단부 쪽을 비닐과 천막으로 둘둘 싸놓은 모습이다. 경주시는 지진으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상태에서 폭우로 인한 2차 피해를 우려, 첨성대 뿐 경주 일대 문화재들에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고육책임은 알겠지만 비닐과 천막을 허리에 두른 첨성대는 왠지 처량했다.
KTX를 타기 위해 신경주역으로 향했다. 빈손이 허전해 특산품 매장을 찾았다. 황량한 역사 풍경에 ‘지진 탓이냐’고 물었다.
“연결 교통편이 시원치 않으니 신경주역은 찾는 사람이 원래 드물어요. 지진이요? 그때는 건물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역사 직원들이 밖으로 대피하라고 방송하고 뛰어다니고. 지금은 멀쩡해 보이는 저 천장이 내려앉는 바람에 기겁을 했죠.”
매장직원 이모(59·여)씨는 지진이라고는 생각 못하고 기차가 탈선해 건물이라도 덮친 줄 알았다고 했다. 신경주역은 2004년 착공해 2010년 준공한 지은 지 6년 된 건물이다. 나랏돈 867억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