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학계와 업계에서도 회계판 예송 논쟁이라 할 만한 사건이 있어 소개합니다. 논쟁을 제기한 주인공은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입니다. 이 교수는 지난 2일 한국회계기준원 개원 17주년을 맞아 개최한 세미나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K-IFRS’라는 명칭은 우리나라가 국제회계기준(IFRS)을 전면 도입하고 있음에도 ‘K’라는 접두어 때문에 마치 우리나라 지역에만 통용되는 회계기준을 사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애초에 우리나라는 세계 시장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 IFRS를 도입했는데 여전히 ‘K’라는 알파벳 하나 때문에 당초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럼 우리나라가 IFRS를 도입하면서 ‘K’라는 접두어는 왜 붙은 걸까요? 이 교수는 “IFRS를 도입할 당시 정부와 감독기관이 법령상 회계기준에 대한 통제 권한을 놓지 않기 위해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검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영미권 국가들처럼 IFRS를 법규가 아니라 사회규범 형식으로 도입을 했다면 정부가 회계기준 수정을 요구할 권한이나 IFRS를 제·개정할 때 정부에 보고하거나 승인하는 절차는 의미를 잃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회계기준에 있어서의 정부 개입 권한이 축소됐을 것이란 의미지요.
물론 정부가 회계기준에 개입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의견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IFRS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나라 특유의 실정에 맞는 제도가 필요할 때도 있겠지요. 가령 최근 대우조선해양이나 대우건설 등 수주기업의 회계 투명성 문제가 시장 전체의 신뢰를 훼손하는 상황에서는 우리 실정에 맞게 사업장별 미청구공사와 공사진행률, 대손충당금 등을 구체적으로 공시하는 ‘수주기업 회계투명성 제고 방안’과 같은 대책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수주기업 사업장별 공시는 IFRS가 요구하고 있는 사안은 아니지요.
하지만 정부나 감독당국이 회계기준에 자꾸 개입하게 되면 ‘규칙’ 중심이 아니라 ‘원칙’ 안에서 기업의 자율을 강조하는 IFRS의 취지가 무색해 질 수 있다는 점을 회계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회계학 교수들이 해외 저널에 기고한 영문 학술원고의 ‘K-IFRS’ 명칭이 해외 논문 심사자들에게 IFRS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일어났다고 하지요. 우리나라가 IFRS를 전면 도입하는데 얼마나 공을 들여 왔는데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황당한 일입니다.
지난 2008년 회계기준원이 빅4 회계법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접두어 ‘K’를 붙이자는 안을 지지한 회계법인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IFRS 앞에 Korean을 붙이면 국제회계기준과 같지 않은 별도의 회계기준을 우리나라가 적용하고 있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속내를 살펴보면 정부와 회계감독당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기업과 감사인들의 정서가 투영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계기준원 세미나에 참석한 한 기업인은 “IFRS 앞에 ‘K’를 붙이려는 것은 관료들이 선호하는 것인데 국제적으로는 적용되지 않는 새로운 기준을 정부가 더욱 엄격하게 마련하려고 하다보니 회계가 일종의 ‘약속’이 아니라 ‘규제’로 인식되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습니다.
IFRS 앞에 ‘K’를 넣느냐, 빼느냐. 일반 시민들이 보기에는 아주 지엽말단적이고 시시콜콜한 논쟁으로 보이는 이 사안이 시장과 정부 간 힘 싸움 논리가 들어 있다는 것.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난리통 이후 시장 경제의 새로운 질서를 재건하려는 상황에서 자본의 자유를 우선시 하는 자유방임형 시장경제를 만들 것인지, 정부가 일정 부분 시장에 개입하는 규제 받는 시장경제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숨어 있다는 것.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조선의 질서를 세우려는 서인과 남인의 힘 겨루기가 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일어난 예송 논쟁 사건과 비교할 만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