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영국 극작가 니나 레인 희곡 원작
엘리트 가족에 감춰진 허상 폭로
소통의 부재 표현한 무대 연출 ''눈길''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논쟁 말고 대화를 해.”
지난달 18일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의 한 장면. 겉돌기만 하는 가족과의 대화에 질린 딸 루스가 내뱉는다. 연극의 주제는 이 짧은 대사에 함축돼 있다. 영국 극작가 니나 레인의 희곡이 원작으로 원제는 ‘부족’(Tribes). 가족의 속살을 파헤치는 작품으로 2014년 초연 이후 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의 한 장면(사진=노네임씨어터컴퍼니, 국립정동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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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영국을 배경으로 어느 엘리트 가족의 허상을 폭로한다. 언어에 집착하는 학술 비평가 아버지 크리스토퍼, 추리 소설 작가 어머니 베스, 언어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형 다니엘, 오페라 가수를 지망하는 누나 루스, 그리고 청각장애인 막내 빌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겉보기엔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가족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크리스토퍼는 대화보다 논쟁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른 가족의 이야기엔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라도 논쟁할 준비가 돼 있다는 듯 누군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면 반박하며 거세게 몰아세울 뿐이다.
크리스토퍼의 강압적인 태도 때문에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다 결핍을 지니고 있다. 베스는 소설 집필을 좀처럼 끝내지 못하고 있고, 다니엘은 대마초 중독자이며, 루스는 연애를 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늘 주눅 들어 있다. 빌리는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를 지녔지만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 때문에 수화를 배우지 못했다. 대신 입 모양을 보고 말뜻을 이해하는 ‘구순술’로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다.
|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의 한 장면(사진=노네임씨어터컴퍼니, 국립정동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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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게 평온함을 유지하던 이들 가족의 관계는 빌리의 여자친구 실비아의 등장으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실비아는 빌리와 달리 후천적으로 청각을 잃어가고 있다. 빌리는 실비아를 통해 수화를 배우고, 청각장애인의 커뮤니티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가족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들 가족의 불통은 빌리가 외치는 “나는 이 가족의 마스코트에요”라는 말로 폭발한다.
가족 사이의 소통 문제를 다룬 연극답게 이를 표현하는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다. 특히 2막에서 빌리가 가족들을 향해 쌓여 있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장면은 인물들의 속마음을 무대 뒤 벽면에 자막으로 표현하며 대화와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잘 보여준다. 무대 양옆에 설치된 조명을 통해 소통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을 더 집중하게 만드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니나 레인은 “가족이란 그 구성원들이 믿는 것, 그들의 문화, 그들의 언어를 그대로 전수하고 공유하고 싶어 하는 하나의 부족”이라는 생각으로 이번 희곡을 썼다. 작가의 집필 의도처럼 연극은 가족 안에서 제대로 된 대화는 가능한지 질문한다. 그 답은 다소 부정적이다. 가족과의 단절을 택한 빌리가 실비아와 또 다시 비슷한 갈등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극은 아주 작은 희망을 하나 남겨둔다. 가족 사이에서 소통은 불가능할지라고 ‘사랑’은 가능하다고 말이다.
|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의 한 장면(사진=노네임씨어터컴퍼니, 국립정동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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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에 이어 연출가 박정희가 연출을 맡고 여신동 아트디렉터가 창작진으로 참여했다. 크리스토퍼 역에 남명렬·오대식, 베스 역에 정재은·김정영, 다니엘 역에 안재영·오정택, 루스 역에 임찬민, 빌리 역에 이재균·강승호, 실비아 역에 박정원이 출연한다. 불통(不通)을 다룬 연극이지만, 무대 위 6명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연기만큼은 제대로 통(通)한다. 공연은 오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