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말 이래 테마섹을 비롯해 아시아 및 중동 국부펀드들이 서구 은행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신용위기가 바닥을 칠 것"이란 기대감도 함께 일기 시작했다. 회복을 염두에 두어야 투자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짐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신용위기는 회복될 줄 모르고 계속 곪고 있는 상황. 따라서 자금을 투입했던 은행들의 주가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면서 오히려 국부펀드들의 투자는 "신용위기의 깊이를 잘 모르는 잘못된 시기의 투자였다"고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같은 시기 미국 투자은행 투자를 개시한 한국투자공사(KIC)는 평가손을 빨리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나섰다. 그러나 테마섹은 오히려 메릴린치에 대한 투자금을 더 늘리고 있어 속내가 더욱 궁금해진다.
◇ 테마섹, 메릴린치에 추가투자 `강공`
테마섹은 지난 28일(현지시간) 85억5000만달러 규모의 메릴린치 증자에 참여키로 했다.
테마섹은 지난해 12월과 3월에도 메릴린치에 각각 44억달러, 6억달러씩을 투자했다. 두 번 모두 주당 48달러에 증자에 참여했다.
이번에 테마섹이 더 투입하는 자금은 총 34억달러. 그러나 실제 들어가는 자금은 9억 달러다.
메릴린치는 "1년 안에 다시 신주를 발행하게 된다면 차액을 보상해 주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메릴린치의 이날 종가가 24.33달러이고, 주당 22.5달러에 증자가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차액은 25억달러에 달한다. 테마섹은 이를 다시 메릴린치에 쏟아 붓기로 한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테마섹은 소폭 할인된 가격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차액을 보상받기로 해 투자에 대한 리스크는 줄였지만, 그렇게 받은 보상금을 다시 투자에 사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공격적인 투자가 아닐 수 없다.
모간스탠리는 중국투자공사(CIC) 투자를 받을 때 2010년 보통주 전환시까지 연 9%의 배당금을 주기로 했으며, 싱가포르 투자청(GIC) 등이 씨티그룹에 투자할 때에도 7%의 배당금을 확정받았다.
테마섹은 지난 6월 영국 바클레이즈에도 추가로 투자했다. 45억 파운드 규모의 증자에 테마섹은 2억 파운드(3억9880만달러)를, 중국개발은행(CDB)도 1억3600만 파운드를 더 투입키로 했다.
그러나 바클레이즈로부터는 주가 하락과 관련해 어떤 보상 조건도 받지 못했다.
한 아시아 투자은행 관계자는 "테마섹은 메릴린치나 바클레이즈 투자로부터 즐거움을 얻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보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은 신속히 감지한 것 같다"고 말했다.
◇ KIC "손실 빨리 털어내자"..보통주로 전환
반면 같은 날 KIC는 메릴린치와의 재협상을 통해 기존 의무전환우선주 20억달러(약 2조원)어치를 보통주로 조기 전환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KIC는 메릴린치 보통주 7224만3217주를 보유하게 됐다. 지분율은 약 4.5~5.0%로 메릴린치의 2대 주주이다.
KIC는 보유 지분 가치가 12억달러까지 줄어 8억달러 가량의 평가손이 발생하자, 향후 2년간 받을 수 있는 4억달러 가량의 확정배당금 수익을 포기하고 빨리 중간 매듭을 짓기로 한 것이다.
주가가 계속 떨어진다면 확정된 수익까지도 얻을 수 없게 됐지만, KIC측은 추가 부실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해 이렇게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진영욱 KIC 사장은 "우리는 메릴린치 투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향후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29일 밝혔다.
WSJ도 아시아 국부펀드들이 자국내에서 미국 투자은행 투자와 관련해 비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테마섹과는 달리 "KIC는 투자 전망에 대해 재고했다"며 지목했다.
◇ 테마섹, 공격 투자 `주목`
테마섹은 메릴린치의 경우 이번 투자로 9% 정도의 지분을 더 확보, 지분율은 약 15%에 이르게 된다. 명실상부한 메릴린치 1대 주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
지난해 말 존 테인 메릴린치 최고경영자(CEO)는 테마섹의 지분 매입에 대한 일부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테마섹은 열정적인 투자자이지만, 경영을 통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FT는 이같은 말은 사실이겠지만, 테마섹이 미국 금융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우려가 다시 제기될 수도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