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명기(名妓)’ 황진이(하지원)를 앞에 둔 선비 김은호(장근석)의 고백. 이어 두 손을 황진이의 두 뺨에 대려 하지만 김철규 PD가 싸늘하게 자르고 들어온다. “컷, 은호야 메말라 보여 좀 젖어줘야지 아프게 바라보고, 진이는 앞으로 나오면 안돼. 덤비는 것 같잖아.” 당돌하게 되받아치는 황진이. “감독님 차라리 제가 은호 얼굴을 잡고 키스하면 안될까요?”
18일 오후 경북 예천군 용문면 병암정, 첫회부터 시청률 20%를 뛰어넘은 KBS 2TV 사극 ‘황진이’ 촬영 현장. 기생 수업을 받는 황진이와 첫사랑 김은호의 키스가 깔끔하게 정리돼야 하지만 10여 차례 NG 속에 30여명 스태프의 이마에 땀이 자꾸 맺힌다. 어스름이 깔리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된 황진이. 좀처럼 지친 기색을 비치지 않는다.
“기녀는 결국 술 따르는 여자 아닌가요?” 부러 어깃장을 놓아봤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엔터테이너이자 예술가이기도 하죠.”
그는 “지금이야 TV와 공연장에서 숱한 예인을 만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기녀가 그 역할을 했다”며 “하지만 술을 따라야 하고 때로 몸도 줘야 하며 사랑도 쉽게 할 수 없어 고통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왜 황진이는 이런 시조도 지었잖아요.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음 그 다음에 뭐더라. 학교 다닐 때 배웠는데….”
그는 연기를 통해 험난한 기녀의 삶을 체험하고 있다. “거꾸로 세워서 발만 묶고 춤을 추게 하는데 촬영 과정에서 실제로 눈물 흘리는 엑스트라도 있었어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녀의 삶은 힘겹죠.” 그리고 덧붙인다. “기녀에게 가장 중한 벗은 고통이다.”
하지원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연기자. 깎아지른 듯한 콧날, 왕방울 같은 눈의 여배우가 ‘난무’하는 요즘 그의 외양은 ‘우리 이웃’에 가깝다. 그럼에도 TV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톱클래스’ 대접을 받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범상함 때문. 남자 행세를 하는 절륜한 무예의 조선 여형사 채옥(‘다모’), 두 남자를 사랑하는 분열적 자아(自我)의 여성 수정 (‘발리에서 생긴 일’) 등 그가 맡아 주목받은 역할은 대부분 캐릭터의 정형을 깨뜨린 것들. 어디에나 쉽게 젖어드는 ‘물’ 같은 외모와 연기력의 힘이다. 전통적 ‘여성다움’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황진이’는 기회가 될 수도,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제 얼굴이 뭐 인형 같지도 않고, 찐하지도 안잖아요. 평범하니까 이런 저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좀 더 예뻤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드라마 ‘다모’, 영화 ‘형사’에서의 하지원은 몸이 날랜 편 같다. 이번 ‘황진이’에서도 대역을 마다하고 집 앞 마당에 ‘장비’를 설치해 줄타기를 배웠다. 꼭 2주가 걸렸다. “뭔가 부족한 거 같아 계속 배우고 싶어요. 재미있는 건, 배우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관련 영화나 드라마를 찍는단 거예요. 무용에 관심이 생겼는데 ‘형사’ 때문에 발레, 탱고를 연습하게 된 것처럼요. 제가 ‘신기(神氣)’가 있는 건가요? 무서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