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현지에서 월가의 핫한 시선을 전해 드립니다. 월가브리핑이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고 투자의 맥을 짚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가는 매일 숨 가쁘게 돌아갑니다. 그날그날 주요 금융사 실무진들이 쏟아내는 각종 보고서와 투자 노트를 읽는 것만으로 시간이 부족합니다. 월가를 이끄는 리더들의 ‘큰 그림’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자는 국제금융협회(IIF)가 지난 11일(현지시간)부터 닷새 일정으로 개최한 연례 멤버십 총회에 직접 참석했습니다.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을 비롯해 블랙록,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씨티그룹,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바클레이스, HSBC, UBS, BNP 파리바 등 주요 기관들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같은 석학들도 대거 나왔습니다. 한국 최고의 경제 석학으로 꼽히는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조사국장 역시 모습을 드러냈고요.
기자가 11일 아침부터 대부분 세션을 지켜보며 놀란 게 있는데요. 거의 모든 월가 수장들이 인플레이션을 언급했다는 겁니다. 의심의 여지 없는 화두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견은 약간 갈렸습니다. 브라이언 모이니헌 BoA 최고경영자(CEO), 찰스 샤프 웰스파고 CEO, 마크 터커 HSBC 회장 같은 인사는 인플레가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나머지 상당수는 예상보다 우려의 정도가 컸습니다. 얼추 3대7 정도의 비율로 보였습니다. 인플레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게 컨센서스인 겁니다. 크게 세 가지 포인트로 이를 다뤄보겠습니다.
|
|
①공급망 문제 심각하다
이번 IIF 총회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공급망’입니다. 최근 글로벌 공급망이 사실상 붕괴 상태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33년째 이끌고 있는 래리 핑크 회장은 “일부 기업들이 심각한 구인난을 겪으면서 임금은 더 빠른 속도로 오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 한 한국 대기업 제조사 고위인사는 “공장을 지을 인부들이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투자 유치를 위해 해당 주(州)가 내건 인센티브가 ‘현장 인부들을 주정부가 구해주겠다’는 것이었는데,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미국 내 주요 항만에서는 인력이 부족해 하역 절차가 늦어지고 있고요. 배에서 내려진 짐을 육상 허브로 옮길 트럭 운전기사가 없는 실정입니다. 핑크 회장이 딱 지적한 지점입니다.
세계 최대 가구 브랜드인 이케아는 미국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습니다. 이런 이케아에서 상품을 사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합니다. ‘재고 없음’ 문구만 떠있는 게 부지기수입니다. 이케아가 14일 로이터통신과 만났는데, 그 요지가 “가장 큰 문제는 이케아 제품의 4분의1을 중국에서 생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없어서 물건을 제대로 실어나를 수 없다는 겁니다. 이케아 매장을 관리하는 지주회사인 잉카그룹의 제스퍼 브로딘 CEO는 “이케아의 그 누구도 이같은 공급망 붕괴를 예견하지 못했다”며 “예상치 못할 미래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핑크 회장뿐만 아닙니다. 매해 노벨상 단골 후보로 거론되는 카르멘 라인하트 세계은행(WB) 수석이코노미스트(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최근 물가 급등은 공급망 충격 속에 지속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
②인플레 더 장기화한다
공급망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해관계자들이 많아서 단순히 돈만 푼다고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물류 대란을 해소한답시고 “주7일 24시간 풀가동”을 외쳤겠습니까. 이렇게 일할 인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심각한 공급망 붕괴는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많은 월가 수장들은 이번 인플레가 짧게 끝날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대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를 이끄는 존 월드런 대표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공급망 대란으로 인해 이미 기대인플레가 높아진 상태”라며 “완화하려면 1년 혹은 2년, 어쩌면 그 이상 걸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월드런 대표는 “기대인플레가 높은 수준에서 장기간 고착화할 경우 그만큼 (정책 목표치인 2.0%로 다시 안정화하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며 “(인플레가 얼마나 장기화할지 여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최대 관심사”라고 했습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집계를 보면, 향후 1년간 예상되는 인플레는 8월 5.2%입니다. 2013년 기대인플레 집계를 내놓은 이래 가장 높습니다.
이케아 얘기를 다시 해보지요. 브로딘 CEO는 “이번 퍼펙트 스톰이 지나가면 또 많은 걸 배우게 될 것”이라면서도 “내년까지는 공급망 붕괴가 이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인플레가 결코 일시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인플레가 일시적이라는 입장을 취해 왔던 연방준비제도(Fed) 역시 미묘한 변화가 있습니다. 올해 IIF 총회에 나온 ‘연준 2인자’ 리처드 클라리다 부의장은 “최근 인플레 흐름은 상방 리스크가 있다고 보고 있다”며 “동료들 대부분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지금은 전형적인 비용 상승 인플레(cost-push inflation) 국면입니다. 수요가 높아서 생기는 수요 견인 인플레(demand-pull inflation)는 연준이 돈을 빨아들이는 식으로 정책 대응을 할 여지가 있는데요. 비용이 상승하면 연준은 난감해집니다. 긴축에 나서자니 가뜩이나 물류 대란에 꽉 막힌 경제가 둔화할까 두렵고, 돈을 추가로 풀자니 안 그래도 높은 인플레를 더 부추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까지 갔던 오일 쇼크 역시 정책당국이 손 쓰기 어려웠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케인스 학파의 총수요 관리 정책으로는 설명이 어렵다는 겁니다.
|
|
③정책당국 믿기 어렵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국을 믿기 어렵다는 견해도 더러 나왔습니다. 또다른 금융계 리더인 데이비드 매케이 로열뱅크오브캐나다(RBC) CEO는 “일부 경영자들은 ‘현재 높은 인플레는 일시적’이라는 중앙은행 인사들의 확신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며 “(중앙은행과 기업은) 다소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8월3일자 월가서 고개 드는 연준 통화정책 ‘실기론’[김정남의 월가브리핑] 기사 참조>
이번 사태를 몇 달 전부터 예견했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정책 당국자들이 1970년대 이후 인플레의 위험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질타했습니다. 시장은 1970년대 초인플레가 온 이후 30~40년간 물가가 떨어지는데 익숙해져 있는데, 예기치 못한 인플레가 덮칠 경우 충격은 클 수 있다는 핑크 회장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시장이든 당국이든 인플레 리스크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겁니다.
서머스 교수는 그러면서 “연준을 비롯한 중앙은행들은 인플레가 닥쳤을 때 취해야 할 (통화 긴축의) 조치들에 대해 투자자들을 준비시키지 않고 있다”며 “금융시장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
◇스태그플레이션 정말 올까
그래서 근래 월가에서 나오는 화두가 ‘딴 세상 얘기’처럼 여겨졌던 스태그플레이션입니다. 올해 IIF 총회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은 주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았습니다. 핑크 회장이 “현실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정도입니다.
현재 국면에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섣부른 감이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와 내년 미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5.6%, 4.0%로 제시했습니다. 잠재성장률을 한참 뛰어넘습니다. 교과서적으로 볼 때 경제 회복의 지속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침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는 겁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왔다는 1974년과 1975년을 볼까요. 당시 성장률은 각각 -0.5%, -0.2%였습니다. 1982년의 경우 -1.8%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게 있습니다. 시장 참가자들의 반응은 조금씩 심각해지고 있다는 건데요. 월가 일부에서 나오는 말이 채권수익률곡선의 평탄화(커브 플래트닝)입니다. 근래 채권수익률곡선(일드커브)이 눕는 걸 경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 겁니다.
일드커브는 만기 기간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수익률의 변동을 나타냅니다. 장단기 금리 차이가 작아지면 곡선은 편평한 형태(커브 플래트닝)를 띠지요. 미래 불확실성 때문에 장기금리가 단기금리보다 높은 게 자연스러운데, 그 차이가 작아진다는 건 침체의 전조로 받아들여 집니다. 반대의 경우 가파른 형태(커브 스티프닝)를 보입니다.
최근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빠르게 오르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날만 해도 주로 1.5% 초반대에서 움직였습니다. 최근 1.6%를 넘었다가 되려 하락하는 기류마저 보입니다. 미국의 7년물, 10년물, 20년물, 30년물 장기국채금리는 모두 잠재성장률을 밑돌고 있습니다. 미국 국채 수요는 언제든 높다는 점을 감안해도(국채가격 상승·국채금리 하락), 너무 낮아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반면 연준 통화정책에 민감한 2년물 금리는 최근 0.4%대를 넘어섰습니다.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인플레로 인해 연준의 긴축이 빨라질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 겁니다.
월가의 한 채권 어드바이저는 “갑자기 뛰는 단기금리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면서도 “커브가 평탄화하는 건 스태그플레이션이 아예 먼 얘기는 아니라는 정도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