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성범죄 교수 OUT"…대학가 휩쓰는 新풍속 '포스트잇 시위'

뉴시스 기자I 2018.04.07 14:50:45
【서울=뉴시스】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나 어렵던가요.” “학교는 룸쌀롱이 아닙니다.”

지난달 30일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건물에 있는 A교수의 연구실 문 앞과 복도는 ‘사과해’ ‘그냥 나가’ 등의 내용이 적힌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뒤덮기 시작했다. 성추문이 불거진 해당 교수가 1년이 지나도록 사과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이 공동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당신의 인격을 의심합니다’ ‘윤리에 우리는 없나요?’ ‘오늘밤 룸인공은 나야 나!’ ‘초이스는 룸살롱에서’처럼 교수의 문제적인 행동을 꼬집는 내용을 포스트잇에 적어 넣으며 항의의 뜻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대학가에서 교수들을 향한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이 이어지면서 ‘포스트잇’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포스트잇이 연대와 저항의 뜻을 나타내는 한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자발적으로 개인 의견을 표출하며 참여하는 미투·위드유 운동의 성격과 통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달 23일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조형예술대학 K교수와 음악대학 S교수의 연구실 앞에 교수들을 비판하고 이들의 사퇴를 촉구하는 포스트잇 수백장을 붙였다.

이화여대에서는 지난달 20일 페이스북을 통해 K교수가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하고 자신의 지인들에게 접대를 부추겼다는 익명의 제보가 올라왔다. 이어 22일에는 S교수가 자세 교정, 악기 지도 등을 이유로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일삼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포스트잇에 ‘당신이 탓할 것은 당신의 죄뿐입니다’ ‘OUT! 나가세요’ ‘더러워! 방 빼!’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등을 적으며 교수들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성폭력 의혹이 불거진 덕성여자대학교 3명의 교수들 연구실 문 앞에도 ‘잠시나마 당신을 존경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빨리 나가라’ ‘Me Too’ ‘덕성의 수치’ ‘방 빼’ 등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지난달 8일 덕성여대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지난 2009년 1학기 타 대학 서양어문학부에서 강의하던 A교수로터 볼과 허벅지 등을 쓰다듬는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앞서 지난달 1일에는 B교수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으며 거부하면 ‘사회 활동, 대학원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협박을 받기도 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또 교내 커뮤니티에는 예술대학 소속 C교수로부터 7년 전 강제 성폭행을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학생들은 이들 교수 연구실 앞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처벌과 사과를 강력히 요구했다. 학교 측의 포스트잇 제거를 우려해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도 쓰기도 했다.

연세대 학생들과 성신여대 학생들 역시 성추문에 휩싸인 교수를 향해 포스트잇 시위를 진행했다.

지난해 12월 연세대 신촌캠퍼스 곳곳에는 문과대학 소속 한 교수가 수업시간 조모임을 만들면서 강단 앞으로 여학생을 불러내 남학생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했다는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 작성자는 “소위 룸살롱의 ‘초이스’라는 상황과 겹쳐졌다”고 비판했으며, 해당 교수가 수업 뒤 뒤풀이 술자리에서도 성희롱 발언을 자주 해왔다고 폭로했다.

1년 가까이 교수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자 총여학생회는 연서명을 받는 등 학생들 뜻을 모으기 시작했고, 포스트잇 퍼포먼스는 익명의 학생 30여명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성신여대에서는 지난달 말 교내 게시판에 A교수를 향한 미투 폭로 대자보가 붙었다. A교수가 학생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행동과 발언을 했다는 내용이다. 해당 교수는 ‘허위 사실’이라며 대자보 작성자를 대상으로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현재 A교수 연구실 앞과 복도는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피해자도 성신이고 붙인이도 성신이다’ 등의 항위 포스트잇이 뒤덮고 있다.

포스트잇은 지난 2016년 서울 강남역 인근 상가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20대 여성을 추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국 곳곳에 붙여진 바 있다.

이후 같은 해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정비용역업체 직원을 애도하기 위해 포스트잇 추모 물결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강남역 사건부터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피해자와 연대하는 흐름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며 “포스트잇도 강남역 사건부터 하나의 미디어로 등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당시는 ‘연대’의 뜻이었다면 요즘 학생들은 더 적극적으로 가해자의 ‘처벌’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며 “연구실 앞에 학생들의 메시지가 붙여지는 것이 교수에게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자 최대의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소장은 “포스트잇 퍼포먼스는 개개인의 각성에서 기초한 흐름이란 면에서 미투, 위드유 운동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수단”이라며 “포스트잇은 형식과 내용이 다 다르고 자기기 편한대로 쓰는 것이다. 그만큼 자연발생적이고 민주적이며 개개인의 관점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진단했다.

정 소장은 또 “아직 익명의 수단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회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만큼 안전하지 않다는 방증”이라며 “학생들이 사회로 나갔을 때 좌절한 개인으로 돌아서지 않도록 어른들이 미투 운동을 잘 이끌어가야한다”고 당부했다.

연세대 포스트잇/첨부용/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