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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자손, 20만 년의 ''대장정''이 궁금하다면…

프레시안 기자I 2011.04.03 13:41:46

[프레시안 books] 앨리스 로버츠의 <인류의 위대한 여행>

[프레시안 제공] '굴욕 게임'이란 게 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너무 유명해서 다들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자신은 읽지 않은 책 제목을 댄다. 좌중 가운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점수가 높다. 더 큰 굴욕을 당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과학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게임을 한다면 <이기적 유전자>나 <코스모스>를 부르짖는 사람이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로 고백하건대, 나는 리처드 리키의 <오리진>을 읽지 않았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도 읽지 않았다. 북극에서 물고기 화석을 발굴하는 생물학자의 책을 번역한 일도 있으면서 어째서 우리 종의 과거에는 흥미가 없었을까. 구차한 변명을 꼽아보자면, 수십만 년 이전의 무슨 세(世)니 기(紀)니 하는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통 외우질 못하겠다는 것, 내 눈엔 고만고만해 보이는 돌멩이들로 어떻게 선사시대의 가족 구성까지 읽어내는지 알쏭달쏭하다는 것, 진화를 기정사실로 믿고 있으니 어떤 화석을 보든 놀랄 일은 없으리라 지레짐작했다는 것, 대충 그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인류의 위대한 여행>을 소개해도 괜찮을까?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걱정은 깊어졌다. 이 책은 2009년에 씌어졌는데, 이후 불과 두어 해 만에 책의 주장과 어긋나는 발견이 이루어져 고인류학계가 뜨겁게 달궈졌다는 것이다. 비판적 독서를 할 만한 소양이 안 되어도 재미있게 읽힐까? 결론인즉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읽으라고 쓰인 책이었다. 하기야 원래 영국 BBC 방송의 5부작 다큐멘터리였던 것을 글로 풀어낸 책이라니까. 고고학적 시대 구분과 유전학 기법이 설명된 첫 50여 쪽을 꼼꼼히 읽어낼 약간의 인내, 다섯 대륙을 누비는 550여 쪽의 여정을 느긋하게 따라갈 충분한 시간, 그리고 (더 좋기로는) 커다란 지구본. 이것만 있으면 누구든 이 여행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책으로 충족된 호기심보다도 더 많은 의문과 관심을 새로 갖게 될 것이다. 또한 화석을 떠낼 모종삽이나 DNA를 채취할 면봉을 들고 세상에서 가장 더운 곳과 추운 곳, 사막과 우림, 동굴과 바다에서 인생을 헌신하는 과학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인류의 위대한 여행>은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온 세계로 퍼진 인류가 그 과정에 남긴 자취를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저자가 1년 동안 뒤쫓아 본 기록이다. 여기에서 인류란 호모 사피엔스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나 호모 에렉투스 같은 다른 호미닌들도 언급되지만, 관심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우리 종의 직계 선조다.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나 Y 염색체의 특정 유전자를 거의 그대로 물려주었던 최초의 사람. 호미닌 최초로 말을 할 줄 알았고 문화를 전승할 줄 알았던 사람들. 결국 다른 호미닌들이 모두 사라진 땅에 홀로 남은, 호모 속의 유일한 종.

당연히 출발지는 아프리카다. 저자는 약 20만 년 전에 고대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했던 아프리카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부시먼 족과 함께 사냥을 해보고, 장식 구슬을 만들어본다. 현재의 수렵·채집인을 연구하는 민족지학이 반드시 고인류학에 도움이 되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원시에 가까운 환경에서 당시의 기술로 생활해 보면 책상물림으로는 몰랐을 실질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기왕 아프리카에 갔으니, 가장 오래된 사피엔스 머리뼈가 발견된 에티오피아의 발굴지도 안 가볼 수 없다. 인류학자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성지순례일 테니까.

다음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 다른 대륙으로 진출할 차례다. 호모 사피엔스는 동아프리카에서 홍해 남쪽을 지나 아라비아 반도를 건넌 뒤, 인도로 진출했다. 이어 인도네시아를 거쳤고, 지금보다 해수면이 훨씬 낮았기에 그다지 멀지 않았을 바닷길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갔다. 저자는 아프리카 밖에서 발굴된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머리뼈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있었던 보르네오 섬의 니아 동굴로 가본다. 그러고는 인도네시아의 롬복 섬에서 숨바와 섬까지 장장 10시간 동안 대나무 뗏목을 저어 가 본다. 우리 선조가 바닷길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남아시아에서 들르지 않으면 섭섭한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호모 사피엔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듯한 이른바 '호빗' 족, 체구가 난쟁이만 한 호모 플로렌시스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던 플로레스 섬이다.

이쯤 되면 독자는 어렵기만 했던 연대 구분에도 제법 익숙해져, 여행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한결 흥이 난다. 게다가 다음 목적지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바로 우리가 사는 곳이다. 고인류학의 정설은 남아시아로 내려갔던 호모 사피엔스가 북향하여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못지않게 오래된 유물들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히말라야 북쪽 길도 유효했으리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흥미롭다기보다 놀라운 것은 중국의 이야기다. 중국은 중국인이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게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호모 에렉투스로부터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는 가설을 국가적으로 장려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다지역 기원설'이 각광 받는 현장이다. 저자는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머리뼈를 보고도 설득되지 않는다. 머리뼈의 형태도 형태려니와, 유전학적 증거는 동아시아인이 모두 예외 없이 아프리카 조상에서 비롯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은 유럽. 아프리카와 가까우면서도 오스트레일리아보다 늦게 호모 사피엔스의 발이 닿았던 대륙이다. 뭐니 뭐니 해도 유럽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관계다. 이미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던 네안데르탈인을 우리 선조가 멸종시켰을까? 두 종은 교류가 있었을까? 혹시 현생 인류의 DNA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을까? 아니면, 네안데르탈인은 우리 선조와의 교류와는 무관하게 그저 환경 변화로 인해 멸종한 것뿐일까? 화석이나 유적의 형태학에 의존했던 탐구가 오늘날은 네안데르탈인의 뼈에서 직접 얻은 DNA를 분석하는 유전학적 탐구로 이어지면서, 이런 의문들은 갈수록 흥미진진한 것이 되고 있다.

마지막은 아메리카다. 우리 선조가 최후로 발을 들여놓은 땅. 현재는 유럽 이민자들의 사회가 되었지만, 베링 해협이 연결되어 있었던 과거에는 아시아인이 건너가서 살았던 땅. 이곳에서도 고고학은 나날이 새롭게 쓰이고 있다. 한때 최후 빙하기 이후에 북아메리카 대륙의 빙하가 녹으면서 비로소 인류가 남아메리카까지 퍼져 나갔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최근 그보다 이전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남아메리카의 유전적 다양성이 큰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질러서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는 빙하의 가장자리 해안가를 따라서 진즉에 남하했을지도 모른다. 그 증거가 되어주는 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 칠레의 유적지에서 저자의 긴 여행은 막을 내린다. 이제 수렵·채집인마냥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1년의 여정을 끝내고 정착 생활로 돌아갈 때다. 먼 옛날에 우리 선조가 그랬듯이.

책을 덮고, 저자가 직접 그린 (재주가 많기도 하지!) 아름다운 스케치들로 구성된 표지 그림을 새삼스럽게 뜯어본다. 그 정경들에 숨은 오래된 이야기를 끌어내어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과학자들의 열정을 생각해본다. 비단 화석을 다루는 고인류학과 유물을 다루는 고고학만 있는 게 아니다. 아마도 그 어떤 요인보다 중요한 요소였을 과거의 기후를 연구하는 고기후학, 고고학의 총아로 떠오른 유전학, 진화 계통 이해의 실마리가 되어주는 언어학도 있다.

저자는 해부학자인지라 석기의 미묘한 형태 변화와 연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보면서 '석기 연구를 안 하길 정말 잘했다'며 혀를 내두르지만, 우리가 보기엔 손바닥만 한 머리뼈에서 언어 능력의 유무까지 추리해내는 사람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기원을 찾아가는 과거로의 그 여행은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했던 여행만큼이나 도전적이고 근사하다. 어쩌면 그 여행은 이제 겨우 첫 발을 뗀 정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졌던 선입견들은 몽땅 사라졌다. 고고학은 이렇게 생생하고, 엄밀하고, 새로운 학문이었다.

P.S.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유전자 교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2010년에 나왔는데, 역자도 지적해둔 그 내용에 대해서 더 알려면 <과학동아> 2011년 3월호의 네안데르탈인 특집을 보면 좋겠다. /김명남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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