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그런 한씨가 찾은 곳은 경기도 화성의 자동차안전연구원 주행시험장. 이날 오후3시쯤 주행도로 한쪽 끝에서 기아자동차 스포티지R이 출발했다. 사람이 타지 않은 자동차는 시속 50km의 속도로 200여 미터를 달려와 정지해있던 검정색 그랜저를 들이받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랜저는 20m 넘게 튕겨나갔고, 스포티지R 앞좌석에선 에어백이 터졌다.
자동차에 탑재된 사고기록장치(EDR)가 사고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공개실험이었다. 류기형 교통안전공단 결함조사팀장은 “EDR은 급발진 추정사고의 원인을 밝힐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치”라고 말했다.
EDR은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교통사고 전후 차량의 상태 및 운전자의 조작여부를 기록하는 장치다. 에어백 센서와 연결돼 충돌로 에어백이 터지기까지 5초 동안 가속페달과 제동페달 작동여부, 알피엠(분당 엔진회전수), 속력 등 15가지 항목의 정보를 저장한다. 당시 한씨의 차에는 장착돼 있지 않았지만, 2009년 미국에서 발생한 도요타 자동차 급발진 등 최근 외국에선 급발진 추정사고의 원인을 밝히는 핵심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이날 실험은 정부가 꾸린 자동차 급발진 민관 합동조사단과 한씨 가족 등 참관인 1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EDR이 기록한 정보의 정확성을 비교·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동차 내부에 EDR처럼 차의 현황을 기록하는 계측장치를 달고 인위적인 사고를 연출해, 양 기계가 기록한 내용을 비교해보는 방식이다. 실험 결과 속력과 알피엠, 가속페달, 제동페달 조작여부 등 측정한 5개 항목의 수치가 모두 유사했다. 장석원 급발진 합동조사단 고장분석전문가는 “EDR의 신뢰성이 입증됐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사회적 논란으로 부각되고 있는 급발진 추정사고의 원인규명에 EDR사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급발진 추정사고 신고건수는 모두 241건. 자동차제작사가 아닌 사고당사자들이 직접 급발진을 입증해야 하는 현행 규정상, 한씨처럼 EDR없이 자비로 감정비를 지불하면 약 50억원의 비용을 사고자가 감당해야 하는 셈이다.
조무영 국토부 자동차운영과장은 “지난 4월 대구 와룡시장 급발진 사고 이후 EDR의 필요성을 인식해 이 장치를 어떤 식으로 도입해야 할지 검토해왔다”며 “모든 차량에 EDR을 달도록 하는 건 어렵더라도, 최소한 EDR이 달린 자동차가 유사사고를 일으킬 경우 자동차 제작사가 그 자료를 의무적으로 제공하게끔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서는 자동차 제작사들이 영업상의 이유로 EDR 공개를 꺼려 급발진을 호소하는 자동차 보유자들이 이를 입증하기 어렵거나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조 과장은 “비록 해외 사례를 포함해 EDR이 사용된 조사에서 급발진이 증명된 경우는 없었지만, 조사절차가 간결해져 사고당사자들의 부담은 한결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류기형 결함조사팀장은 ”EDR의 신뢰성이 확인된 만큼 예정대로 오는 8월30일 현대차 그랜저와 기아차 스포티지R의 급발진 여부 조사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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