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이 고향인 홍범도 장군 유해가 한국으로 온 까닭은?

이수빈 기자I 2021.08.21 21:00:19

광복절,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 유해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승리했음을 의미
북한측 홍 장군 평양 봉환 주장하며 강력 반발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홍 장군 유해 봉환에 노력 기울여

지난 15일 독립지사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16일과 17일 이틀간 국민추모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78년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5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임시 안치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오랜 기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한 홍 장군의 유해를 한국에 모신 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추진해온 독립유공자 유해봉환 사업이 일군 큰 성과다.

아울러 북한과의 외교전에서의 승리해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독립군의 안식처가 대한민국이라는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국가 전통성 확보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고 홍범도 장군 훈장 추서식에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뒤 박수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① 북한과의 외교전에서의 승리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옮기려는 시도는 북한에서 먼저 이뤄졌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국가의 정통성으로 삼는 북한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심으로써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이미 1993년경 홍 장군 유해를 북으로 봉환하겠다며 카자흐스탄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고려인 사회가 남북한과의 관계를 고민하다 결국 봉환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 조사단은 1994년 9월 홍 장군 묘소를 조사하고 카자흐스탄 정부 측과 유해봉환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북한은 1995년 8월 28일 평양방송을 통해 "홍 장군 유해봉환은 (남측의) 사기협작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는 홍 장군 유해를 모시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96년 5월에는 기업과 함께 홍 장군 묘역 정비사업 지원에 1만 달러를 투입해 홍 장군 흉상 주변에 3개의 기념비를 건립하고 공원묘역을 단장했다.

2017년 7월에는 묘소 실태조사 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관계자 등과 면담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논의했고 2019년 4월 문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순방 최종 보고 때 홍 장군 유해봉환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진 양국간 협의 끝에 문 대통령은 지난해 3월 1일 제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최초 발표했다.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홍 장군의 유해봉환도 본격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됐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홍 장군 유해를 평양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지난해 6월23일 "유해는 그의 고향인 평양에 안치돼야 한다"며 "카자흐스탄 정부도 북과 남이 통일된 이후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유해봉환 책동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

그러나 이같은 북한측의 반발에도 지난 16일 토카예프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며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귀국길에 올랐다.

18일 오전 홍범도 장군의 영정과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식 행사장으로 들어오고 있다.(사진=뉴시스)


②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연장선

홍범도 장군은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홍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지 못한 데에는 독립 이후 벌어진 이념갈등과 한국전쟁이 그 바탕에 있다.

우선 카자흐스탄은 냉전시대 동안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유해봉환을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에도 1991년까지 약 40년 동안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에 남아 있었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항일무장투쟁’이 아닌 ‘3.1운동’을 국가의 정통성으로 삼았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발행한 논문 ‘남북한 정통성 만들기 역사와 비교’(조은희)에 따르면 1948년 남과 북이 각각 건국하는 과정에서 차용한 역사정통성은 모두 ‘항일’과 관련한 역사였으나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강조했다.

또한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며 국가 수립에 일제 경찰제도를 이용하는 등 친일파의 청산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뤘던 항일무장투쟁단체들이 미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등의 한계 탓에 항일무장투쟁의 역사가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친일청산보다는 반공투쟁이 국가의 중심 사업이 되며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는 중심 의제에서 밀려났다. 특히 박정희 정부 들어서는 북측에서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역사를 신격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정통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언급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분위기가 달라진 계기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추진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초다. 김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 최우선 국정과제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천명하고 일제 및 독재 체제 잔재 청산에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 선열 유해 봉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상해 임시정부 청사 건물을 옮겨오는 일도 추진하였다.

또한 1991년 카자흐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 1992년 우리나라와 국교를 수립한 이후 정부도 적극적으로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북측도 평양이 고향인 홍범도 장군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서면 남북간의 외교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봉환을 추진한지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 홍 장군의 유해가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카자흐스탄과의 경제교류 확대로 인해 카자흐스탄 정부가 북한의 반발을 무시하고 한국정부의 손을 들어준 결과다.

홍범도 장군은 누구?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일제 치하에서 의병 투쟁에 투신했다. 간도와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1920년 6월에는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한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 대승을 거둔 '청산리 대첩'을 지휘했다. 특히 봉오동 전투는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의 첫승이라는 의미가 있다.

1937년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했고 1943년, 광복을 2년 앞두고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스냅타임 이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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