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서울 용산구에서 영등포구로 출근하는 장은영(26)씨는 서울에 올해 첫 긴급 호우재난문자가 발송될 때도 정시에 출근했다. 비가 많이 와도 알아서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사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씨는 “평소 30분 정도 빨리 나오는 편이라 지각하지 않았지만, 택시가 안 잡히고 대중교통은 막혀서 비가 많이 온 날은 출근 시간에 간신히 도착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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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폭우가 발생한 올해 여름에도 직장인의 과반수는 정시출근을 요구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직장인은 재난 상황에서 지각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겪기도 해 기후변화에 맞는 안전한 직장 문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단법인 직장갑질119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5월 31일부터 6월 10일까지 전국 만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자연재해 상황 출근 경험’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직장인의 61.4%는 태풍·폭염·폭설·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정부가 재택근무나 출퇴근 시각 조정을 권고한 상황에서도 정시에 출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15.9%는 자연재해 상황에서 지각했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겪거나 동료가 불이익을 경험한 것을 목격했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영등포구에 직장을 둔 한모(35)씨는 “비 많이 온 날은 지하철이 지연되고 사람도 많이 타서 평소보다 20분 일찍 나와도 30분 정도 늦었다”며 “출퇴근에 위험이 있는 날은 한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하거나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먼저 공지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부 직장인은 사용자로부터 무급휴가 사용을 강요받기도 했다. 보육교사 A씨는 지난해 8월 태풍이 예보돼 휴원명령이 내려졌을 때 원장으로부터 교사 개인 연차를 차감하고 하루 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아이들이 없어도 처리해야 할 서류와 업무가 있어서 출근하겠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체육시설에서 일하는 직장인 B씨도 이달 들어서 소장으로부터 비 오는 날마다 쉬라는 지시를 받았다. B씨는 “(소장은)근로계약서에 ‘비·눈으로 인한 휴식시간은 근로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조항을 이용해 직원들을 모두 내보냈다”며 “이번 달은 장마 때문에 12일도 일하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건강권 지킬 제도는 구멍…“기후변화에 맞게 법령 보완 필요”
일반 직장인은 재난상황에서 위험한 출근과 비자발적인 휴업을 강요받아도 보호받을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다. 공무원 경우 ‘국가공무원 복무규정’과 ‘지방공무원 복무규정’은 천재지변, 교통 차단 또는 그 밖의 사유로 출근이 불가능할 때 공가를 승인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반면 공무원이 아닌 노동자는 현행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령에 천재지변이나 자연재해에 따른 휴업 등에 관한 별도의 규정이 없어 태풍이나 호우주의보 상황에서 출퇴근 시각을 조정할지, 쉬게 할 경우 유급휴일을 적용할지는 사업주의 재량에 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극한 출근의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 기상청은 이달 들어서 과거 강수량 기록을 뛰어넘는 폭우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8일 경북 안동시와 상주시에는 각각 211.2㎜와 196㎜씩 비가 내려 하루 강수량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 17일 경기 파주시에서는 1시간 최다강수량이 100㎜를 초과하면서 하루 동안 385.7㎜에 달하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 비로 파주를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는 산사태 이재민이 발생했고, 충남에선 인명피해가 있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변화하는 기상 상황에 발맞춰 관련 법령을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많은 사업체가 노동자와 협의한 취업규칙으로 재난 상황의 출퇴근을 규정하지만, 작은 기업은 이 규칙을 형식적으로 두는 경우가 많아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며 “날씨가 노동자의 이동과 근무에 제약을 주는 상황이라면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고용노동부가 산업안전법이나 근로기준법 등 관련 법령을 손질해 사용자의 노동자 보호 의무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조주희 직장갑질119 노무사는“현행 노동관계법령에 의하면 사용자가 허용하지 않는 한 천재지변 등 재난 상황이라도 지각·결근은 ‘근로자의 귀책사유’이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도 노동자의 책임이다”며 “변화하는 환경에서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안전·재난문자 발송보다 실질적인 제도와 법령 마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