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 가을이 따라온다, `경주 양동마을`

심보배 기자I 2018.08.29 07:57:30

경주 양동마을



[이데일리 트립in 심보배 기자] 시간여행은 사계절 중 가을이 가장 좋다. 더욱 풍성해지는 계절, 가장 화려해지는 산과 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오니 말이다. 지나온 수많은 시간에도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풍경을 보며, 감탄하며, 이 계절을 즐겼으리라.

가을의 맛은 다양함이다. 집마다 장맛이 다르듯, 같은 나무에서 자란 나뭇잎의 색이 다르듯, 같은 모습과 다른 모습을 모두 가지고, 조화를 이룬 가을의 산과 들. 이런 가을과 닮은 시간 속 여행지는 ‘경주 양동 마을’이다. 청명한 하늘, 머릿결만 살짝 날리는 바람, 햇살은 적당히 따사로우며, 나지막한 토담 길은 정겨움이 묻어난다. 그 어느 날, 헛기침하며 양반이 느린 걸음으로 거닐었을 길, 해맑은 아이가 골목을 뛰어다녔을 것 같은 길을 걷는다. 해 질 무렵 굴뚝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밥 짓는 냄새가 마을을 가득 채우고 저녁을 먹었을 것 같은, 아련한 풍경이 마을 이곳저곳에서 불쑥 튀어져 나온다.



아담한 초가집 평상에는 빨갛게 익은 고추가 햇살에 붉은 윤기를 머금고, 제맛을 내기 위해 자기를 불태운다. 가을이면 추수 하느라 분주했을 옛날 그들의 삶이 그려지고, 추억은 미화되어 아름다운 잔상을 남긴다. 마을 사람들은 500년 동안 이곳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생로병사를 거듭했으리라.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연이 흙과 나뭇결과 돌담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마을을 지키는 고목과 고택, 마루를 받치는 디딤돌까지 온전히 그 시간을 함께 했으리라. 안방에선 사랑이 피었을 것이고, 사랑방에선 맑은 술 한잔하며, 달빛과 황금빛 들판을 보며 가을의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양동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1992년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방문하면서 더욱 관심을 끌게 되었다. 100년 이상 된 54호의 기와집과 110여 호의 초가집이 마을을 이루고, 관가정, 손소영정, 무첨당, 통감속편과 서백당 등 국가 민속문화재 12점, 여주이씨 수졸당파 문중 고문서 등 도지정문화재 8점이 있다.

양반 집성촌을 이루는 대표적인 곳으로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여주 이씨,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 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경주 손씨가 함께 500년 동안 마을을 이어오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전 이미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았고 유교적 정신, 전통 양반문화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 189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탐방코스를 둘러보자면 반나절이 훌쩍 넘는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면 필수 코스는 꼭 둘러보고 가자. 보물 제442호인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12호인 향단(香壇),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無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인 서백당(書百堂).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사랑채에서 바라 보이는 평야와 배롱나무꽃이 가을의 풍류를 더해준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보이는 파란 하늘과 떠다니는 구름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좁은 문을 통해 시간도, 사람도, 바람도, 풍경도, 스쳐 지나간다. 양동마을은 우리가 보았던 영화 ‘취화선’, ‘내 마음의 풍금’, ‘혈의 누’, ‘스캔들’ 등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양동마을 초입에 있는 오동나무 집은 식당 내부와 정원도 깨끗하게 관리가 잘 된 곳이다. 든든한 식사로 토종닭 백숙, 오리백숙, 빨간 찜닭 요리가 가능하다. 더위에 지친 심신에 활력을 주는 보양식으로 진한 콩국수를 택해도 좋다. 전통 술맛을 느끼고 싶다면, 찹쌀과 누룩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동동주 맛도 놓칠 수 없다.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특유의 맛은 여름에는 신맛이, 겨울에는 단맛이 난다. 또 다른 맛집 우향 다옥은 7대째 내려오는 한정식 전문점이다. 양동마을도 북촌 한옥마을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라 여행자는 에티켓을 지켜야 하는 곳이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이, 그 후손들이 보아야 할 귀중한 마을이라는 사실, 역사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존되고, 지속하여, 이어지는 것이다.

양동마을을 빠져 나오는 길, 500년 전의 가을이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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