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B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IBK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명예퇴직 제도가 장기간 사실상 유명무실해지면서 국책은행 노사 모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부서장이나 지점장 등 관리직을 거친 이후 사실상 현업에서 배제되는 55세 이상 임금피크제 돌입 직원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인력운영의 비효율뿐 아니라 선·후배간 세대갈등도 커지고 있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그렇다고 ‘돈 많이 줘 내보내자’는 주장도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국책은행 노사와 금융당국이 어떤 대안을 내놓을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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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는 만 55세 이상이 되면 임금이 매년 줄어들도록 설계된 제도다. 지난 2016년 정년이 만 55세에서 60세로 연장되면서 늘어나는 늘어난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모든 공공기관에 도입됐다.
지난해 산업은행 전체 직원에서 임금피크제에 돌입한 직원 비중은 8.6%(274명)다. 2년 후인 2022년이 되면 이 비율이 18.2%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인원 수로는 399명이다. 전체 인력의 8분의1 가량이 임금피크제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도 사정은 비슷하다.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임금피크제 적용 직원 비중은 지난해 각각 3.9%과 3.4%였지만, 2022년이 되면 각각 12.3%(1033명)와 7.0%(69명)로 높아질 전망이다.
시중은행은 사정이 다르다. 두둑한 명예퇴직금으로 조기 퇴직을 유도한다. 통상 21~36개월치 평균 임금에 더해 수천만원의 자녀 학자금, 전직 지원금 등을 제공한다. NH농협은행 한곳에서만 올해 500명 이상의 명예퇴직 신청자가 나왔다. 시중은행에선 임금피크제 진입자가 매우 드물다.
국책은행은 시중은행에 비해 명예퇴직금이 상당히 낮다. 이 때문에 자발적 퇴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국책은행의 입장이다.
기획재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국책은행 명예퇴직금은 월평균 임금의 45%를 기준 급여로 삼고, 여기에 퇴직까지 남은 잔여기간의 절반을 곱해서 명예퇴직금을 산정한다. 지금 받는 임금의 4분의 1 가량만 명예퇴직금으로 지급한다는 뜻이다.
반면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면 임금이 줄어들지만, 그래도 남은 기간 동안 절반 이상의 임금을 받을 수 있다. 명예퇴직금보다 임금피크제의 급여가 많기 때문에 굳이 명예퇴직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이는 국책은행의 인력 노후화로 이어진다. 한국금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금융공공기관 인력 중 50대 이상이 36.9%를 차지했다. 40대는 46.3%, 30대는 11.7%, 20대는 5.0% 등이었다. 50대 이상 비중이 두번째로 많다. 반면 금융권 전체의 50대 이상 비중 평균은 13.7%에 불과하다. 30대(39%), 40대(31.9%), 20대(15%) 보다 50대의 비중이 더 낮다. 유독 국책은행의 50대 비중이 크게 높다는 뜻이다. 국책은행은 기재부에서 정원 통제를 받는다. 퇴직자가 없으면 그만큼 신규 충원도 제한된다.
이 때문에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방문규 수출입은행장·윤종원 기업은행장뿐 아니라 국책은행 노조에도 한목소리로 명예퇴직금 현실화 필요성을 강조한다. 국책금융기관노동조합협의회는 지난 7월 자체 대안을 마련해 금융위원회에 제출했다. 임금피크제 적용 1년 후 퇴직하면 나머지 2~3년간의 임금피크제 급여를 명퇴금으로 한번에 지급하는 제안이다. 어차피 은행으로선 지급해야 할 임피제 급여를 명퇴금으로 주는 것이라 추가 부담이 없고 명예퇴직을 유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출입은행장을 역임한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이런 주장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재부는 전체 공공기관에서 금융부문에만 별도의 퇴직금 산정규정을 적용하는 건 형평성 등 문제가 있다며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국책은행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부문 공공기관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요구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형선 국책금융기관노조협의회 회장(기업은행 노조위원장)은 “금융산업의 특성이 있는데 340개 공공기관에 일률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다 보니 현장의 애로가 반영이 안 된다”면서 “지속적으로 기재부를 상대로 설득작업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국책은행 급여는 시중은행보다 높아
여론도 우호적이건 아니다. 국책은행 명퇴금이 시중은행보다 크게 적지만, 평소 급여는 대체로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를 보면, 산은의 지난해 직원 1인당 평균 연봉은 1억988만원으로 집계된다. 수은의 지난해 평균연봉은 1억205만원이다. 지난해 신한은행·KB국민은행·우리은행·하나은행·한국씨티은행·SC제일은행 등 6개 시중은행의 직원 1인당 평균 연봉은 9600만원이었다. 기업은행의 경우 금융감독원 공시 기준으로 1인당 평균연봉이 8415만원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 하면서도 많은 급여와 직업적 안정성이 높아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는데, 여기다 명퇴금까지 시중은행 수준으로 맞춰주면 뒷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여론 때문에 국책은행도 조심스럽다. 한편에서는 임금피크제에 들어간 직원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산은의 경우 55세 이상 임금피크제 직원을 대상으로 올해 38개의 신규 적합직무를 개발했다. 또 성과가 우수한 직원에 대해선 임금피크제 진입 유예 등 인센티브 부여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기재부는 올해 업무보고서에서 공공기관의 임금피크제 인력을 창업·중소기업과 매칭해 지원인력으로 활용하는 ‘셰르파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급여는 소속 공공기관이 지급하고 수당은 참여 중소기업이 부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은행 업무가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하는 상황에서 임금피크제 직원의 업무범위에 한계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장기간 관리업무를 하다가 지원부서 실무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