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서울 마포구에서 태어난 선생은 25세가 되던 해 종로구에 위치한 광성연초공사에서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다 1920년 5월 중국 봉천지점에 기관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봉천에 도착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꿈꿨던 비행사가 되기 위해 직업을 포기하고 비행학교가 있는 광둥으로 향했다. 비행학교가 운영되지 않자 베이징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조선의 독립운동을 목격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1921년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온 선생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여 당시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로 잠입했다.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투척했고 그 중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폭발해 조선총독부가 아수라장이 됐다.
의거 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선생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의열단원인 오성륜 및 이종암과 함께 거사를 계획했다. 1922년 3월 28일 다나카가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저격했으나 오발로 실패했고 폭탄도 던졌으나 아쉽게도 불발됐다.
의거 직후 동지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선생은 피신 중 영국 경찰에게 붙잡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수감됐다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돼 사형을 언도 받았다.
선생은 재판과정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의지를 밝혔으며 사형 판결에 대해서도 상고하지 않았다. 복역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세 차례 특별사면으로 형기가 줄었다. 1942년에 20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 후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인 고등 경찰에게 연행된 후 선생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암살당했다는 추측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