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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어 교사 사업에 뛰어들다
식민지 지배를 노골화 하던 일제의 압박 속에서 조선어 담당이던 장학엽은 민족의식이 남다를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젊은이들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도산 안창호의 ‘실력양성운동’에 깊이 동감했던 장학엽은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사립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사립학교를 설립하려면 자본이 필요했다. 집안의 가업인 과수원으로는 사립학교를 세울만한 돈을 마련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상업을 배웠던 장학엽은 사업을 구상한다. 당시 이른바 돈이 되었던 탄광이나 운수, 벌목 사업 등은 일본의 자본이 들어와 독점하고 있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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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고향에 돌아온 장학엽은 1924년 10월 3일 평남 용강군 진지면 진지동에서 2명의 동업자와 함께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했다. 제품명을 고민하던 장학엽은 진지동(眞池洞)의 진(眞), 증류 방식으로 술을 빚는 과정에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히는 것에 착안한 로(露). 두 글자를 합쳐 ’진천양조상회에서 나오는 술의 상표 이름을 ‘진로’라고 정한다.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진로 소주는 이런 사연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현재 하이트진로의 참이슬 소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주의 역사를 계속 써내려가고 있다.
△소주의 쓴맛 진로를 통해 자리잡다
동업체제로 운영하던 진천양조상회는 1928년 후반부터 장학엽이 단독으로 경영하게 된다. 공동 출자자였던 동업자들이 자기출자분을 회수했기 때문이다. 자본금이 줄어들어 경영이 난관에 빠진 상황에서 장학엽은 결국 술맛 개선만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고 연구에 매진한다.
1928년 조선주조협회에 따르면 전체 조선의 주류시장에서 소주의 비율은 비율을 16.35%였다. 탁주인 막걸리의 비율이 74.52%였던것과 비교하면 4분의 1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장학엽은 생산단가를 낮추고 막걸리가 지니지 못한 맛을 소주에서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흑국(黑麴)소주에 눈을 돌린다. 쌀이나 좁쌀,수수나 누룩으로 소주 술덧을 만들어 증류한 조선 본래의 증류식 소주와 달리 흑국소주는 거무스름한 흑국을 사용해 쓴맛이 나고 생산비를 절감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여기에는 조선총독부가 1924년 연속증류기를 사용해 순도 높은 알코올인 주정(酒精)을 뽑아내 그 주정에 물을 타서 만드는 희석식 소주의 판매를 허가하면서 일본인이 조선의 주류시장을 잠식한데 따른 절박함도 작용했다. 장학엽은 제조 단가가 높고 고급 주종으로 평가받았던 증류식 누룩소주 대신 흑국소주 제조에 명운을 건다. 장학엽은 흑국소주를 도입하면서도 진로 소주만의 독특한 맛을 찾기 위해 실험을 거듭한다. 결국 약간 씁쓸하면서도 짜릿한 맛이 나는 소주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서북 5도의 양조장 중에서 장학엽이 만든 진로 소주는 술맛으로 인정받아 생산량을 늘여나갔다.1930년 동생 장학연이 진천양조상회의 생산부문을 책임지면서 진천양조상회는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한해 3000석의 소주를 생산하는 주류업체로 성장했다.
△소주의 대명사 두꺼비… 소주 세계 1위
장학엽은 해방 이후에도 북한에서 사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터졌고 일가를 이끌고 월남해 부산까지 내려왔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온 장학엽은 일제강점기 일본계 자본이 희석식 소주 생산기지로 삼았던 부산에서 재기를 모색한다. 피난민 출신에 대한 차별을 이겨내고 이북식 소주의 명맥을 보여준 장학엽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서울로 상경한다. 동업자를 구한 장학엽은 서울에 공장터를 물색하다가 영등포구 신길동에 터를 정한다. 당시 신길동은 한강 이남의 지역으로 인구가 없던 지역으로 예전부터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났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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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엽은 진로 상표를 부활시키며 로고에 쓰인 동물을 바꾸기로 한다. 원숭이는 서북 지방에서 영특함을 상징했지만 남한에서는 일본과 교활함의 상징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장학엽은 동물사전을 펼쳐놓고 고심 끝에 전래동화 ‘콩쥐팥쥐전’과 영국동화 ‘두꺼비 왕자’에서 인간을 이롭게 해주고 아침저녁으로 차고 깨끗한 이슬만 받아먹고 산다는 점에서 두꺼비를 상징 동물로 결정한다.
이후 두꺼비를 앞세운 진로 소주는 한국의 전후 경제개발 기적과 함께 성공 신화를 쓴다.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양곡을 원료로 한 소주 판매를 금지하고 희석식 소주 판매만 허용하면서 진로는 희석식 소주의 선두주자로 부상한다. 당시 진로 소주는 “두꺼비 한 병을 까자”, “두꺼비 한 마리를 잡자”라는 식의 유행어를 만들 정도로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진로는 소주의 대명사처럼 자리를 잡는다.
△IMF 파고 넘은 ‘참이슬’ 신화
1924년 첫 출시 당시 진로 소주의 도수는 35도였다. 이후 소주의 도수는 1965년 30도, 1973년에 25도로 점차 낮아졌다. 1960년대와 70년대 식량부족 문제로 정부가 양곡을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해 알코올을 물에 희석시키는 지금의 희석식 소주가 대량생산에 돌입해서다. 이후 25도 소주가 30년간 사랑받았다. 25도의 벽은 1998년 23도의 ‘참이슬’ 출시로 깨졌다. 진로 소주의 적자로 참(眞) 이슬(露)에서 이름을 따온 참이슬은 출시 14년 만에 누적 판매량 200억병을 돌파하며 소주 역사상 최고 판매고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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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이자 진로 소주의 개발자였던 장학엽은 1985년 타계했다. 장학엽은 1974년 자신의 아호를 딴 학교법인 우천학원을 세워 서울 구로구에 우신중·고등학교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실력양성을 꿈꾸던 조선어 교사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1977년 비매품으로 발간한 자서전 ‘항심의 세월’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와 동고동락 했던 진로의 역사를 증언해놨다.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은 “진로가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주류의 역사이기도 하다”며 “진로 소주의 명맥을 잇는 참이슬을 국내 시장 뿐 아니라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