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저출산 추세가 시작된 1980년대 초반이 훨씬 지난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할 정도로 늦은 것이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지난 20여 년간 모든 대책을 ‘묻지 마 예산’으로 투입하고도 소용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그동안 여러 나라가 시행했던 대책 모두를 한국이 이미 다 해봤는데 우리 같은 전문가들의 조언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라는 농담을 하는 해외 석학도 있었다. 지난주 이데일리-페리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위스콘신 대학교 티모시 스미딩 교수가 한 말이었다. 그는 이제 남아 있는 정책으로 이민정책을 제대로 만들어서 해보는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는 모든 부처가 앞다투어 할 수 있는 정책은 다 해봤다. 2006년부터는 5년 단위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도 수립해서 내년에 4차 계획이 마무리된다. 이제 마지막 처방으로 부총리급 ‘인구전략기획부’를 신설해서 모든 저출산 정책을 기획하고 총괄하는 방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인구전략기획부’ 신설 관련 법안은 야당 중심 국회에서도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요한 것은 이 부처가 출범하면서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구문제를 갖고 3일간 개최된 지난주의 ‘이데일리 전략포럼’에서 국내외 전문가들이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저출산의 당사자인 젊은 층의 참여와 호응도 뜨거웠다는 점에서 인구전략기획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발표와 사회로 참여했던 필자가 이 중에서 몇 가지를 추려서 주문하고자 한다.
첫째, 서둘지 말아야 한다. 원인분석부터 시작해야 한다. 결혼하고 출산을 해야 하는 당사자인 20~30대가 왜 결혼을 꺼리거나 늦추고, 결혼하고도 왜 늦게 자녀를 갖거나 아예 갖지 않으려 하는지를 차분히 제대로 읽어 내야 한다. 그동안은 많은 전문가가 저마다 그 원인을 한마디씩 강하게 내세웠다. 집값 때문에, 교육비 때문에, 직장에서의 불이익 때문에 등등 진단이 달랐고 처방 또한 달랐다. 사실 원인은 복합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합적이라도 어느 원인이 더 많이 작용했나를 가려내는 것은 전문가와 과학의 몫이다. 저출생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원인을 과학적으로 가려내는 연구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둘째, 지금 뭘 잘못하고 있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고 또 하는 모든 저출생 정책을 체계적으로 사후평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취하고 버린 건가를 정해서 선택과 집중을 할 대상 정책을 고르는 작업이 필요하다.
셋째, 집중할 정책에 대해서 언제 어떻게 할 건가를 결정해야 한다. 집중할 대상 정책과 또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는 반드시 과학적인 사전평가가 진행되어야 한다. 저출생이라는 시급한 문제를 놓고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보다는 시간을 갖고 철저히 근거를 갖고 사전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기반 정책평가(Evidence-Based Policy Evaluation)는 데이터와 평가방법론이라는 두 가지 평가 인프라에 의존해야 한다. 특정 정책에 대해 일회성 설문조사를 통해 국민 의견을 물어보고 이를 기초로 시행 여부와 시행 방향을 정하는 어리석음을 더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데이터는 패널데이터이다. 동일한 개인이나 가구를 매년 추적조사해서 이들이 어떤 행태변화를 보이는가의 정보를 데이터로 축적하는 것이 패널데이터이다. 미국은 미시간대학이 PSID (Panel Study of Income Dynamics)라는 패널데이터를 1968년부터 이어오고 있다. 처음 이 조사에 포함된 가구에서 당시 갓 태어난 아이가 이제 56세가 된 지금까지 보육과 교육을 받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고 다시 결혼시키는 등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이 데이터를 이용한 경제학계와 사회학계의 수많은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또 이를 정책평가와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우리도 노동패널, 청년패널, 여성패널 등등 많은 패널데이터를 갖고 있다. 이를 저출생 원인분석과 기존 저출생 정책의 사후평가 그리고 새로운 정책의 사전평가에 활용해야 한다. 이번 이데일리 전략포럼에서 위스콘신대 바바라 울프 교수의 발표가 주목받았는데, 이는 새로운 데이터를 활용하여 우리 여성의 저출산 원인을 분석 발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2010년~2022년 기간의 미국지역사회조사(American Community Survey)로부터 미국 거주 한국계 여성과 한국 거주 여성의 출산 성향을 비교하여 미국 거주 한국계 여성들의 출산율이 한국 거주 여성보다 0.5명이나 더 높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출산 성향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책평가 방법론으로 무작위대조시험(RCT: Randomized Controlled Test) 역시 이번 포럼에서 주목받았다. 한국에서 앞으로 실행될 수 있을 다섯 가지 이민정책의 RCT 방안을 미국 MDRC에서 참여한 두 연구자가 수개월간의 연구를 통해 제안했다. 새롭게 시행될 이민정책을 임의로 적용하는 실험집단(Treatment Group)과 그렇지 않은 대조집단(Control Group)으로 구분해서 이들의 행태변화를 관찰해서 정책 효과를 사전에 분석하는 실험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젠더갈등’이다. 이번 행사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출산의 당사자인 여성에 대한 지나친 배려와 남성에 대한 역차별에 불만을 토로하는 남성들의 글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 커지고 있는 젠더갈등도 저출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해소하는 노력과 함께 정책논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 소지가 없도록 하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우리 역사에서 인구전략기획부가 마지막 저출산 대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