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 아일랜드를 이끌어 온 버티 어헌(Ahern·56) 총리가 퇴진한다. 재직 중 꼬리처럼 따라붙었던 수뢰 의혹을 끝내 털어내지 못한 것이다.
1993년부터 시작된 아일랜드 고도성장의 불을 지난 11년간 계속 지펴오며, 동유럽 국가들의 성장 모델이 된 '켈틱 타이거(Celtic Tiger·아일랜드 경제 붐)'를 주도한 그에겐 '불명예' 퇴진이다.
유럽의 현역 지도자들 중 최장수(11년·3선) 총리인 그는 2일 더블린 의회에서 "5월 6일 총리직을 물러나겠다"고 밝히면서, 감정에 북받친 모습이었다. "결코 부정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공직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비리 의혹을 부인했다.
◆정치 오점 붙지 않던 '테플론 총리'
인구 400만 명의 섬나라 아일랜드는 1980년대만 해도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변방 국가였다. 미국의 IT(정보기술) 붐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면서 1993년부터 경제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그 주역은 1997년·2002년·2007년 세 차례 연속 총선에서 승리한 어헌 총리였다.
소박한 외모처럼 종종 더블린의 동네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보통 사람의 이미지를 심어왔다. 정당 간 알력이나 노조 분쟁을 조정하는데도 뛰어난 '협상의 달인'이다.
최대 치적은 1998년 영국의 토니 블레어(Blair) 총리와 함께, 기독교 신·구교 간 유혈충돌이 끊임없던 북아일랜드에서 '굿 프라이데이 협정(Good Friday Agreement· 벨파스트 평화협정)'을 체결해낸 것. 이 협정으로 북아일랜드에서 신·구교 공동 자치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하지만, 개인 비리 의혹이 어헌 총리의 발목을 잡았다. 정치인들이 더블린 시의 개발과 관련해 건설업자들로부터 수뢰한 스캔들을 조사하기 위해 1997년 설립된 마혼 재판부(Mahon Tribunal)에선, 어헌이 1990대 초 재무장관 시절 개발업자로부터 약 50만 유로(약 7억60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특히 어헌 총리와 그의 딸 계좌에 입금된 9만 유로(약 1억4000만원)가 집중타를 맞는다.
어헌은 이 돈이 아내와 별거하면서 지불해야 하는 돈 등을 마련하려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이지, 대가성 뇌물이 아니라고 그동안 주장했다.
또 이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거에 승리해, 그에겐 열에 강한 합성수지 테플론에 빗대어 '테플론(Teflon) 총리'라는 별명도 붙었다.
하지만 5월 말 EU 개정조약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총리를 못 믿겠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연정을 구성하는 녹색당·진보민주당에서 사임 압력이 거세지자 '테플론 총리' 스스로 퇴진을 결심했다.
어헌 총리가 퇴임 시기를 5월 6일로 미룬 것은 그 스스로 "역사적인 초청"이라고 일컫는 자신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이 4월 말로 예정돼 있기 때문. 이후 부총리 겸 재무장관인 브라이언 코웬(Cowen)이 총리직을 이어받을 예정이다.
아일랜드 경제 성장 및 북아일랜드 평화 협상에 기여한 어헌 총리의 업적만큼은 이웃 영국 언론도 높이 평가한다.
일간지 더 타임스는 "어헌의 지칠 줄 모르는 인내와 용기가 굿 프라이데이 협정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11년간 아일랜드를 더 나은 나라로 만들어놓은 점은 평가할 만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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