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1년 9월18일. 남북이 함께 국제연합(UN)에 가입한 이날은 이른바 `남북 경협주` 등장의 서막을 알렸다. 이로써 남북은 대놓고 돈(경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경제협력은 정부가 밀고, 기업이 끌었다. 이 기업이 상장사이거나 이 기업과 관련한 상장사 주가는 영향을 받게 됐다. 사실 전에도 남북경협주(북방주)는 주목을 받았지만 `평화의 동력`이 더해지면서 관심은 더 커졌다. 분야별로 대형 제조주와 금융주, 무역주, 건설주가 많았다. 음식료, 섬유, 철강 부문도 한자리씩 했다. 종목으로 보면 대기업 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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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초기 남북 경협사업은 기업 간에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대우가 북측과 협상을 주도하는 바람에 나머지 기업이 차별을 받는다는 기사는 흥미롭다. 1992년 5월 당시 ‘대북 경협 대우 독주에 업계 불만 폭주’ 제하의 기사를 보면 삼성, 럭키금성, 효성, 쌍용이 북에서 물건을 들여오려다가 대우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되는 사태도 있었다. 당시 △럭키금성 화학·전자 △삼성 전자·섬유·식품·무역 △효성 화학·무역 △쌍용 무역 등에 뛰어들어 있었다.
여하튼 대우를 좌장으로 남북경협에 속도가 붙었고, 경협주 투자 심리는 타올랐다. 김우중 회장이 1992년 1월15~26일까지 방북한 것은 대형 호재였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김 회장은 “의류, 신발, 가방 등 합작공장을 설립하고, 북한이 공단을 지어 남한 기업을 유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당시 언론은 `김 회장의 방북 성과가 주식시장에 호재로 작용하고, 3월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라는 기대도 대형 호재`라고 평가했다. 기자회견 직후 대우그룹 관련주를 비롯해 철강주와 전력주가 강세를 보였다.
변수는 정치였다. 기정사실화됐던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1992년 첫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하지 못했다. 핵이 문제였다. 노 대통령은 “북한의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못한다”고 선언(1992년 7월2일)하기에 이르렀다. 관계가 경색하면서 호재는 악재가 됐다. 당시 시황기사는 `남북경협 재개를 두고 증시부양설만 무성하고 실제 대책은 없어 매물이 많은 편이고, 경협주가 보합에 머물며 증시 상승세가 꺾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해 10월 남파간첩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 교류는 단절 상태에 들어갔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경협주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남북 정상회담 재추진 기대감은 증권가를 달궜다. 그러나 다시 교착에 빠졌다. 김일성 주석이 정상회담을 보름가량 앞둔 1994년 7월 사망하면서다. 증권가는 헛갈렸다. `김일성 사망`이 단기 악재인지 장기 호재인지를 두고 설왕설래였다. 엇갈린 전망 속에 `팔자`와 `사자`가 교차하면서 주식시장 거래량이 급증했다. 대북 관련한 현대중공업과 대우자동차 노조는 당시 파업을 철회했고, 덕분에 기업 주가가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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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남북경협은 개성공단 입주(2004년), 개성관광 개시(2007년)로 꽃을 피웠다가 금강산관광 중단(2008년), 개성공단 폐지(2016년)를 겪으며 내리막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과 투자가는 함께 울고 웃었다. 지난해 이뤄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첫 북미 정상회담으로 현재 남북경협주 관심은 최고조에 이르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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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남북경협주 덩치가 줄었다는 것이다. 초기 남북경협주는 대기업 위주였던 터라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지금보다 컸다. 현재 주식시장에서 남북경협주로 구분하는 기업은 시가총액이 대기업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초반에는 `북방주`라는 용어도 흔히 쓰였는데 지금은 사라진 것도 특징이다. 현재는 `남북경협주` 혹은 `대북주`라는 말이 굳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