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대가의 얼 기든 광주 ‘월봉서원’
이황과 기대승 13년간의 우정 ''월봉로맨스''
고봉 기대승 위패 모신 월봉서원
이황에게 받은 편지 글구 등 흔적 남아 있어
서원 나서면 백우산 자락 따라 숲길
| 광주 광산 백우산 기슭에 자리잡은 월봉서원 전경. 퇴계 이황과 26살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13년 동안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성리학의 근간인 ‘사단칠정’을 논했던 고봉 기대승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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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유럽을 대표하는 브로맨스가 있다. 24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우정을 쌓았던 하이든(1732~1809)과 모차르트(1756~1791)가 그들이다. 당시 18세기 유럽은 뛰어난 음악가들이 직접 만나 실력을 겨루는 게 커다란 흥밋거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실력을 겨루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언제나 하이든을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대하며 ‘파파 하이든’이라고 친근하게 불렀고, 하이든은 언제나 “모차르트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도 나이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았던 커플이 있었다. 바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하고 있는 일명 ‘월봉로맨스’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광주 월봉서원으로 향했다.
| 빙월당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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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나이차 뛰어넘은 우정 ‘월봉로맨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이다. 이들은 26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13년 동안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의 근간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고, 더불어 처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눴다.
퇴계 이황은 설명이 필요없는 당시 조선 최고의 유학자였고, 고봉 기대승 또한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기대승은 20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30대에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퇴계 이황과 13년 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면서 한국철학사 정립에 기여했다.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지만, 4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첫 대면은 1558년 무오년 한양에서 이뤄졌다. 퇴계는 이때 이미 나이 쉰여덟의 노인이었고, 고봉은 서른둘의 패기만만한 젊은이였다. 퇴계는 여기서 고봉이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편지로 답한다. 그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이 서신에서 출발한다. 이후 두 학자는 이황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무려 13년 동안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 월봉서원에서 선비의 하루를 체험중인 관광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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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단과 칠정은 유교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가 되는 인간의 네 가지 마음,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겸손하게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이다. 칠정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즉 기쁨과 화남,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등이다.
사단과 칠정을 주제로 한 고봉과 퇴계 논쟁의 쟁점은 주기론과 주리론이었다. 당시 성리학은 우주의 근원과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성을 ‘이(理)’와 ‘기(氣)’ 두 가지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고봉은 사단칠정이 모두 정이라는 주기설을 주장하며 퇴계의 주리론과 맞섰다. 퇴계의 주리론은 경험이나 현실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중시했고, 이후 영남학파의 뿌리가 됐다. 상대적으로 주기론은 현실 세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도덕세계를 존중하는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고봉도 주기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 사단칠정의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논쟁을 통해 이황과 기대승 모두 성리학에 대한 학문의 깊이가 깊어졌고, 또 이를 계기로 조선 유학이 퇴계학파, 율곡학파, 기호유학, 영남유학으로 나눠지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 월봉서원가는길 토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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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의 발길 따라 사색의 걸음을 옮기다.
| 백우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철학자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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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산 백우산 기슭에 자리 잡은 월봉서원을 찾아가려면 먼저 너브실마을로 들어서야 한다. 너브실마을은 행주 기(奇)씨 집성촌으로 기대승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너른계곡’이라는 이름답게 안으로 들어설수록 그 품을 넓히며 여행자를 맞는다. 황톳빛 돌담을 따라가면 고봉 기대승의 위패를 모신 월봉서원이 나온다.
단단하고 반듯한 화강암 돌담을 두른 외삼문이 여행객을 맞는다. 문 위에는 ‘망천문’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너브실마을 앞을 흐르는 ‘황룡강을 바라보는 문’이라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들어서면 너른 마당 안 깊숙이 돌기단 위에 자리 잡은 비월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 장판각까지 거느린 당당한 모습이다. 빙월당은 월봉서원의 강당으로, 1938년 전남 지역의 유림들이 세웠다. 묵묵히 서 있는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고봉 기대승이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6년 뒤 선조 11년에 지방 유림들이 광산군 비아면에 망천사를 찾고 위패를 모셨다. 그로부터 수십년 세월이 흐른 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1654년 효종이 ‘월봉’이란 사액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38년 빙월당을 시작으로 1981년까지 사당과 외삼문, 장판각, 내삼문이 만들어졌다. 한꺼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년 세월에 걸쳐 하나하나 정성 들여 이루어진 모습이다.
‘월봉서원’이라 쓰인 현판을 중심으로 ‘빙월당’, ‘충의당’이라 쓰인 현판이 양쪽으로 걸려있다. 오른쪽 방에는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이라 쓰인 편액이 눈길을 끈다. ‘가난할수록 즐거움이 더한다’는 뜻으로 퇴계 이황이 보낸 편지 중 한 구절이라 한다. 빙월당 뒤편 돌계단을 오르면 고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다. 이 사당도 제법 너른 마당을 거느리고 있다. 사당의 내삼문을 등지고 돌계단에 서면 빙월당의 뒷모습과 너브실마을을 감사고 있는 산자락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월봉서원을 찾는 또 다른 즐거움은 백우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철학자의 길’을 걷는데 있다. 서원을 나서서 기대승의 묘을 찾아 길을 잡는다. 푸른 소나무와 대숲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기대승이 남긴 시조를 새긴 바위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호사롭고 부귀롭기야 신릉군만 할까만/ 백년 못 되어 무덤 위에 받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 월봉서원 빙월당에서 열리는 작은음악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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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 광주 광산 월봉서원(그래픽=문승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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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길= 호남고속도로 장성나들목으로 나와 함평 가는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 황룡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816번 지방도로로 갈아탄다. 황룡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다 왼쪽으로 월봉서원 이정표가 나오면 좌회전한다.
△먹을곳= 너브실 마을에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인 ‘이안당(怡安堂)’에서는 전통문화카페인 ‘다시(茶時)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차(茶) 문화를 몸소 체험해 볼 수 있다. 또한 미리 6명 이상 단체 예약을 한다면 너브실마을에서 기른 식재료로 만든 남도 밥상 차림까지 저렴한 가격에 맛 볼 수 있다.
△잠잘곳= 너브실마을 이안당에는 10~12명이 묵을 수 있는 숙박공간이 있고 동재와 서재에도 20명이 묶을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지만 미리 예약한 단체만 이용 가능하다. 개별여행객이라면 광산구의 무등뉴월드관광호텔(062-942-0734)나 더솔호텔(064-393-7744) 등이 있다.
| 너브실 남도밥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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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공방에서 체험을 하고 있는 체험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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