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더스토리’(INDUSTORY)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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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알렉산드로 볼타가 전기 에너지를 휴대할 수 있는 ‘전지’를 발명하고 182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자기 에너지를 회전운동으로 바꿀 수 있는 ‘모터’를 선보였다. 두 발명품의 만남으로 인간은 어디서든 전지를 이용해 회전 운동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그 첫 적용 대상은 다름 아닌 ‘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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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기관 자동차는 1차 세계대전 종식을 기점으로 경쟁자였던 마차, 전기자동차를 밀어내고 자동차 산업의 주류로 떠올랐다. 현대 교통과 물류의 핵심인 자동차 산업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지배자인 내연기관은 어떻게 세상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임규태 박사는 내연기관 자동차 산업의 부흥은 석유 산업과 연관해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박사는 “내연기관 자동차는 2015년 체결된 파리기후변화협약으로 사실상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다”며 “내연기관 자동차의 역사는 150년 정도로 짧은데, 이마저도 석유 산업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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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전기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에디슨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배터리를 팔기 위한 수단으로 전기자동차를 활용했다.
그러나 에디슨 회사의 한 엔지니어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전기자동차가 아니라 내연기관 자동차 개발에 몰두했다. 그가 바로 헨리 포드다. 포드는 내연기관에 관심이 없던 에디슨을 떠나 자신의 이름을 딴 ‘포드’를 세우고 내연기관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포드가 1896년 최초로 만든 내연기관 자동차 ‘쿼드리사이클’은 휘발유가 아닌 에탄올을 연료로 움직였다. 1908년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고 대량 생산을 시작한 모델 T부터는 에탄올 뿐 아니라 휘발유를 사용한 버전도 함께 만들었고, 1913년부터 휘발유 버전 생산에 집중한다.
1901년 발견된 텍사스의 스핀들톱 유전에서 값싼 석유가 생산되고 보급되면서 에탄올은 연료로서 가격경쟁력을 잃게 된다. 여기에 1919년 시행된 금주법으로 술의 원재료인 에탄올의 생산과 구매가 어려워지자 에탄올을 원료로 한 내연기관 자동차는 순식간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휘발유 내연기관 생산에 집중했던 포드의 선택은 적중했고, 그렇게 현대의 자동차 산업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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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도 포드의 성공을 눈여겨봤다. 그는 대량생산된 모델 T가 미국 국민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에 감명 받았다. 포드가 반유대주의자란 점도 히틀러의 마음을 끌었다. 히틀러는 아우토반 계획의 실행을 지시하는 한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게 독일에도 모델 T와 같은 국민 자동차를 보급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따라 포르쉐 박사는 5명 한 가족이 탈 수 있으면서도 가격과 유지비가 저렴한 승용차 ‘폭스바겐’을 개발하게 된다.
임 박사는 2차 세계 대전을 ‘자원 전쟁’이라 정의했다. 전쟁이 발발한 1939년에는 이미 자동차와 비행기, 배 등 교통수단을 비롯해 무기까지 석유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쓰였다. 히틀러가 중동 지방을 집요하게 노린 것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도 안정적인 석유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2차 세계 대전의 승리는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돌아갔다. 미국은 전쟁 말미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하는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달러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미국은 기축통화가 갖는 무한발권력을 이용해 자국과 서유럽에 전후 복구를 지원하는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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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소련의 물밑 지원을 받은 중동 연합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이 시작하자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스라엘을 지원한 서방을 압박하고자 석유를 감산했고 국제유가는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석유파동’으로 저유가가 상식이던 미국 사회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이를 기점으로 빅3의 위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이 위기에 봉착하자 이 틈을 이용해 치고 올라온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산업기지 역할을 담당했고 미국이 달러 유통을 위해 고안한 ‘채권 리사이클링 시스템’의 파트너였기 때문에 미국 진출이 용이했다.
이에 제동을 건 인물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세금을 줄이고 시장에 유동성을 늘리는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했다. 하지만 야심차게 추진한 레이거노믹스는 채권 리사이클링에 따른 무역적자에 양적완화에 따른 재정적자까지, ‘쌍둥이 적자’라는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미국 경제는 악화했고 레이건 정부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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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 가치 상승으로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일본 자동차 업계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만 했다. 일본 자동차 업계는 때마침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관세 장벽이 사라진 남미에 현지 공장을 세워 관세를 피했다. 또 ‘일본차는 저가’라는 인식을 타파하기 렉서스·인피니티 등 고급 세단을 출시해 유럽 브랜드가 장악하던 고급 세단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이런 노력으로 1985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던 일본의 대미 자동차 수출량은 1995년부터 반등에 성공했다.
◇ 세계의 공장 中, 자동차 생산 비중 급증
채권 리사이클링 시스템의 파트너였던 일본을 버린 미국은 새로운 파트너로 중국을 점찍었다.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편 중국에 다양한 산업 기반 시설을 제공하면서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키웠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국은 공산품을 수출해 얻은 막대한 달러로 미국 국채를 구입해야했다.
2000년 중반 이후 중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전 세계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늘었다. 전통적인 자동차 강국인 미국이나 일본, 독일보다 2배 이상 생산량이 높다. 2018년 기준 중국은 연간 약 270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 1100만 대를 생산한 미국이나 900만 대에 그친 일본을 큰 차이로 따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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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임 박사는 국내 완성차 업계는 급변하는 시장에 대한 대응이 늦다고 진단했다. 임 박사는 “값싼 중국산 자동차가 글로벌 시장에 본격적으로 풀리기 시작하면 가격경쟁력이 무기인 우리나라 자동차의 입지는 약화할 수밖에 없다”라면서 “일본처럼 발 빠르게 ‘하이엔드’ 자동차 시장을 공략했어야 하는데 실기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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