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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론자가 싫어하는 바위 삼형제..돈암·안암·종암[땅의 이름은]

전재욱 기자I 2023.11.18 09:00:00

되놈이 넘던 고개라는 의미의 되넘이고개에서 온 돈암동
종암동 북바위, 안암동 앉일바위 모두 돌이름에서 유래
풍수상 명당으로 꼽히지만, 지반 단단해 난공사 유발지역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50년 6월28일 미아리고개. 북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 나흘째, 북한군에 맞서는 국군은 적에 기습에 치명타를 입고 퇴각을 결정했다. 결국, 미아리 전선이 밀리면서 서울은 북한에 점령됐다. ‘단장(장이 끊어짐)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로 기억되는 이 전투는 한국전쟁 주요 전투로 기록된다.

북바위 유래비(사진=성북문화원)
미아리고개는 서울 북동쪽 길목이어서 전략적 요충지이다. 수세에 몰렸을 때 이곳이 뚫리면 수도는 금세 적에 노출된다는 의미이다. 과거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 군대가 미아리고개를 넘어 한양을 점령했고,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때 미아리고개는 되놈(오랑캐)이 넘어온 고개라고 해서 ‘되넘이고개’라고 불렀다. 이걸 한자로 풀어서 돈암현(敦岩峴)이라는 지명을 붙였는데, 지금의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어진다.

돈암동을 서쪽에 둔 개운산은 동으로는 종암동을, 남으로는 안암동을 끼고 있다. 개운산에는 커다란 북처럼 생긴 북바위가 있었다. 북바위 아래의 전답은 비옥해서 매해 풍년이 들었으니 마을에는 복된 존재였다. 사람들은 북바위가 마치 큰 종 같으니 이 동네를 종암(鍾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의 종암동이다. 종암동 사람들은 매년 10월 초순이면 북바위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의식이다. 지금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인근이다.

고려대를 낀 안암동(安岩洞)은 개운산 자락의 ‘앉일바위’라고 불린 큰 바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앉일바위’를 한자로 옮기면서 편안할 안(安)을 써서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사람 수십 명이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크기의 바위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1950년대 안암동은 동암동(안암동 5가)과 서암동(안암동 1·2가), 남암동(안암동 3·4가)로 구분됐다. 이들 지역을 동과 서, 남으로 가른 중심에 앉을바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고려대 안암병원 자리이다.

모두 바위(岩)를 이름에 붙인 돈암동과 종암동, 안암동. 서로 면하고 있기에 이 일대가 돌밭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바위는 풍수에 대한 여러 해석을 낳는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가 눈을 감자 안암동에 묻으려고 한 것 그곳이 명당이어서였다. (물이 솟는 바람에 정동으로 갔고 지금의 정릉으로 옮겨갔다.) 미아리 점집 거리가 미아리고개에 몰린 것을 우연이라고 보지 않기도 한다.

개발론자 입장에서 보면 바위로 이뤄진 이 지역은 피하고 싶다. 땅을 파려면 삽을 떠야 하는데 돌밭이라서 여의찮다. 실례로 지하철 6호선 안암역와 고려대역을 잇는 구간은 건설 당시 최고의 난공사로 꼽혔다. 단단한 화강암 단층이 자리하고 있어 여기를 뚫는 데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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