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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동을 서쪽에 둔 개운산은 동으로는 종암동을, 남으로는 안암동을 끼고 있다. 개운산에는 커다란 북처럼 생긴 북바위가 있었다. 북바위 아래의 전답은 비옥해서 매해 풍년이 들었으니 마을에는 복된 존재였다. 사람들은 북바위가 마치 큰 종 같으니 이 동네를 종암(鍾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의 종암동이다. 종암동 사람들은 매년 10월 초순이면 북바위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의식이다. 지금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인근이다.
고려대를 낀 안암동(安岩洞)은 개운산 자락의 ‘앉일바위’라고 불린 큰 바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앉일바위’를 한자로 옮기면서 편안할 안(安)을 써서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사람 수십 명이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크기의 바위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1950년대 안암동은 동암동(안암동 5가)과 서암동(안암동 1·2가), 남암동(안암동 3·4가)로 구분됐다. 이들 지역을 동과 서, 남으로 가른 중심에 앉을바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고려대 안암병원 자리이다.
모두 바위(岩)를 이름에 붙인 돈암동과 종암동, 안암동. 서로 면하고 있기에 이 일대가 돌밭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바위는 풍수에 대한 여러 해석을 낳는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가 눈을 감자 안암동에 묻으려고 한 것 그곳이 명당이어서였다. (물이 솟는 바람에 정동으로 갔고 지금의 정릉으로 옮겨갔다.) 미아리 점집 거리가 미아리고개에 몰린 것을 우연이라고 보지 않기도 한다.
개발론자 입장에서 보면 바위로 이뤄진 이 지역은 피하고 싶다. 땅을 파려면 삽을 떠야 하는데 돌밭이라서 여의찮다. 실례로 지하철 6호선 안암역와 고려대역을 잇는 구간은 건설 당시 최고의 난공사로 꼽혔다. 단단한 화강암 단층이 자리하고 있어 여기를 뚫는 데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