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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가 올해 처음 여는 ‘세계여성경제포럼 2012’의 기조연설자를 물색할 때 이런 상황이 크게 다가왔다. ‘성공한 여성 리더’란 컨셉에 맞는 인물을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찾기 쉽지 않았다. 지난한 물색 과정을 통해 후보에 올린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HP) 최고경영자(CEO)가 낙점되는 과정도 쉽지가 않았다. 과연 피오리나를 ‘성공한 여성 리더’로 봐야 할 것이냐, ‘실패한 혹은 쫓겨난 여성 리더’로 봐야할 것이냐가 내부에서 논란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오리나 섭외를 밀어붙인데엔 오히려 이 갑론을박이 더 좋은 이유가 됐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성공만큼 공허한 것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열린 사고방식에 기반해 여전히 세상에 도전 중이기 때문이었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실패가 두려워 변화 못하면 성공도 없다”
‘실리콘밸리의 여제(女帝)’로 불리기도 했지만 칼리 피오리나는 어떤 시점의 결과를 기준으로 하면 실패한 CEO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피오리나의 삶의 태도란 생각이다. 그는 언제나 승자의 태도를 갖고 있다. 그는 실패가 두려워 익숙한 곳에 멈춰서서 지지부진한 현재를 비난하는 모순을 거부한다. 대신 열정을 갖고 변화를 시도하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이를 툭툭 털고 교훈을 얻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는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란 찰스 다윈의 말을 좋아한다.
AT&T에서 루슨트테크놀러지를 분사시킨 것이나 , ‘HP 방식’이라는 창업자들의 신화에 휩싸여 불확실한 위험부담보다는 안전함에만 몰두해 있던 HP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컴팩과의 매머드급 합병을 실행에 옮긴 것은 피오리나가 아니었으면 이뤄지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이런 담대함,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피오리나는 포럼 참석을 앞두고 가진 이데일리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 답을 이렇게 내놓았다. “실패없는 성공, 시련없는 승리란 없습니다. 목표라는 건 완벽한 것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실수는 이 과정과 경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죠. 다만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열정을 바쳤다면 그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배짱. 그건 부모님의 사랑과 신뢰를 갈구해 원치도 않으면서 로스쿨에 진학했던 스물두살의 피오리나가 어리석음을 깨닫고 이를 박차고 나온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피오리나는 이 선택으로부터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란 걸 깨달았고 그제서야 근심 속에서 계속됐던 두통이 사라졌다고 기억했다. 그는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위험 감수나 실수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용기와 겸손, 낙관과 투지가 유리천장 뚫는다”
직업적 성공과 여성성, 혹은 인간적인 성향은 배척 관계로 묶이곤 한다. 피오리나 역시 이성적이고 강한 자아로만 무장된 특별한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저서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에 따르면 아무리 비즈니스계에 오래 몸담아 왔더라도 성(姓)이 아닌 ‘칼리’란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고, HP CEO가 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첫 질문은 “지금 입은 옷이 아르마니 슈트인가요?”였다며 절망감을 토로한다. 일의 결과가 아니라 외모와 옷차림 등 개인적인 면이 부각되었고 HP에 도착한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자신은 실리콘밸리의 이야깃 거리였다고 한다.
HP에서 자신의 자리가 걸린 위임장 다툼을 벌이는 동안, 또 결국 HP를 떠나야 할 때에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을 여성으로만 보는 고객사의 희롱섞인 대응에 서러워 주차장에서 펑펑 울었던 1986년의 어느 날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울지는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론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들이 사랑받기 위해 애쓰면서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일에서 존중받는 것이란 점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불평하기보다는 여성들이 먼저 변하는 쪽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익숙한 사람들과 일하고자 하는 건 인간의 본성입니다. 남성들이 남성들과 일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지요. 이런 본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과 일하는 것이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해 모든 면에서 필수적이란 걸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피오리나는 유리천장(조직 내 여성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과 승진 상한선)은 이런 인식 변화를 통해 깰 수 있다며 이를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꼽았다. 우선 성공할 수 있는 기회. 그러나 이는 모두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또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이나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겸손함, 무엇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일하는 것, 기량과 경험,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낙관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성공이란 수많은 시련 끝에 오는 것이기에 이를 기다려 얻을 수 있는 체력과 투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피오리나에게 리더십이란 지위나 타이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커뮤니티, 회사와 국가에서 결정적인 차별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그는 “리더십의 본질은 사람들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면서 “여성이라고 해서 부정되지 않고 포용될 때 여성들도 충분히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여성들은 타인에게 투자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태생적인 리더”라고 주장했다. 또한 지적능력이 가장 중요한 자원인 21세기에 여성들의 능력과 잠재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사회 경제적인 결과는 자멸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남성들은 여성들의 참여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She is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출신인 칼리 피오리나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사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메릴랜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통신회사 AT&T에 입사해 경력을 쌓았으며 AT&T에서 루슨트테크놀러지를 분사하는 업무를 통해 이름을 날렸다. 1998년 포춘에서 ‘비즈니스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선정됐고 이듬해 HP CEO에 전격 영입되며 주목받았다. HP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며 컴팩과의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며 또다시 화제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실적 부진으로 회사가 어려움에 처한 가운데 이사회로부터 압박을 받아 사임하게 된다. 이후 대만반도체(TSMC) 사외이사 등으로 활동하다 유방암으로 투병했다. 회복된 이후 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피오리나 재단을 설립, 제3세계와 소외된 여성들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