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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조선판 '트로이 목마' 사건, 성벽에 새겨진 역사

강경록 기자I 2018.12.07 06:00:01

충북 청주 상단산성에 새겨진 역사기행
상당산성 성벽길을 따라 걷다
조선판 트로이 목마 ''이인좌의 난''
반란의 역사, 성벽에 새겨지다

상당산성 서남 암문 위에서는 청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영조 4년(1728년) 3월. 충북 청주의 한 산성 앞으로 상여가 올라왔다. 군사들은 상복을 입은 상제와 조문객들이 슬프게 곡을 하며 올라오는 모습을 성벽 위에서 바라봤다. 그들은 그저 상여 행렬을 물끄러미 내려보며 삶의 무상함을 느낄 뿐이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상여에는 시신 대신 무기가 들어 있었다. 영조에 반기를 든 반군의 무리다. 반군들은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목마’처럼 상여를 위장했다. 결국 이들은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함락한다. 이 사건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여기서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난다. 영조는 이 난을 계기로 탕평책을 더욱 강화할 명분을 얻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했다.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반란이 영조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영조는 정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상당산성 남문


◇상단산에 왕관을 두른 듯 서 있는 ‘상당산성’

상당산성 남문 성벽길
충북 청주의 동북쪽과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상당산(492m). 이 위를 두른 산성이 바로 상당산성이다. 마치 상단산이 왕관을 두른 모습이다. 보은의 삼년산성과 함께 충북의 대표 산성으로 손꼽힌다. 상당산성을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산성 성벽길(4.3km)을 따라 오르내리며 걷는 방법과 산성 마을길(600m)과 3.1km의 도로 고갯길을 둘러보는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남문 앞 잔디광장에서 출발해 동장대까지 성벽길을 걷다가 저수지와 산성마을을 함께 둘러보는 코스다.

남문 앞 잔디광장을 지나 남문을 통과하면 성벽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잔디광장과 초겨울 숲의 상쾌함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 길을 따라 500m 정도 걸어가면 ‘남암문’이다. 암문은 몰래 드나드는 작은 사잇문을 말한다. 성벽의 바깥 산 아래에서 드나드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곳에 만든다. 이곳으로 아군이 사람과 가축, 식량 등을 성안으로 몰래 들여오거나, 적군 몰래 아군을 내보내 성 밖과 연락을 한다. 또 적의 뒤편으로 몰래 잠입해 기습하려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상당산성에는 남문인 공남문, 서문인 미호문, 동문인 진동문 등 3개의 문과 동북 암문과 서남 암문 등 두 암문이 있다. 암문이란 몰래 드나드는 작은 사잇문이다. 서남 암문은 남화문으로도 불렀다. 암문의 규모는 너비 약 166cm, 높이 약 172cm이다. 구조로 보아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문을 닫게 되어 있었다. 서남 안문을 지나면 성벽길은 경사 심한 오르막 없이 넓고 편안하다. 북문이 있었던 곳까지 성벽길은 이어지는데, 전망은 물론 길 자체가 아름다워 발걸음까지 가벼워질 정도다.

상당산성 암문으로 나오고 있는 관광객


◇조선판 트로이 목마, ‘상여사건의 전말’

상당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로 ‘상당’이라는 명칭이 백제 때 청주 지명인 ‘상당현’에서 유래했다는 설 때문이다. 성은 돌에 턱을 만들고 다듬어 쌓는 ‘퇴물림 기법’, 혹은 ‘그랭이 기법’으로 쌓았다. 이 방법은 오래된 고성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석축 방법이다. 밑돌에 턱을 만든 후 그 위에 골을 쌓으면 성벽이 잘 무너지지 않아서다.

이곳에 성이 들어선 것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길목이어서다. 조선시대에는 각각 왜란과 호란을 두 번씩 겪으며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가 청주읍성에 있었고, 그 배후인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었다. 산성에는 대략 3500여 명의 병력과 승군이 주둔했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716년)부터 영조 23년(1747년)까지 약 31년간 대대적으로 개축해 만들어졌다. 당시 성벽 축조는 물론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 장대사의 3개 사찰과 암문을 만들었다. 관아 건물과 장대·포루·창고 등도 들어섰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서문·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 있다.

이처럼 중요한 상당산성이 영조의 집권초, 반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인좌를 필두로 한 반군은 영조가 임금이 되기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여기에 더해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했다. 이 모두가 반란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에 영조는 분노했다. 특히 경종 독살설에 대해 “차마 참을 수 없는 말이니 사관은 기록하지 말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사실 이 반란의 배경은 당쟁에 있었다. 경종이 죽고 권력에서 밀려난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강경파가 영조와 영조를 지지한 노론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난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었던 것이다.

상당산성에서 내려다본 청주 시내


◇반란의 역사, 성벽에 오롯이 새겨지다

상당산성에는 11곳에 글씨가 새겨진 돌이 있다. 모두 상당산성을 개축할 때 동원한 사람 이름들이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글씨는 동암문 안쪽 벽에 새겨진 ‘패장 양덕부’다. 양덕부는 영조 때 상당산성을 쌓는 공사 책임자 중 하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양덕부란 이름은 ‘이인좌의 난’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그는 반군과 내통해 성문을 열어준 내부 조력자여서다. 영조실록에는 ‘병사 이봉상이 관기인 월례와 함께 있는데 믿는 신하 비장(裨將) 양덕부가 문을 열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란은 결국 병조참판 오명항과 암행어사를 지낸 박문수에 의해 진압당했다. 진압에 성공한 관군은 그해 4월 18일 도성으로 회군했는데, 영조는 남대문 앞까지 마중 나가 그들을 맞을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인좌의 난이 끝나게 되자 영조는 상당산성의 그 정치적·군사적 주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이후 영조는 상당산성에 운주헌을 중수하고, 포루 5개소를 세웠다. 또 붕괴한 곳과 보수공사도 자신이 왕으로 있는 동안 계속했다.

상당산성 서문


영조가 얼마나 상당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일화도 있다. 1794년 영조는 신하들에게 명을 해 산당산성의 그림을 그려 올리게 했다. 이후 충청병사 이태상은 장계와 함께 상당산성의 그림지도를 왕에게 바쳤다. 당시에는 국가통치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기록화 제작이 가장 활발했었던 시기였다. 영조가 왕명을 직접 내려 상당산성의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그만큼 영조가 상당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영조가 완성한 상당산성의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기록을 보면 상당산성은 동문, 서문, 남문과 암문 2곳, 15개의 포루를 갖춘 성이었다. 성안에는 운주헌과 수첩군관 250명이 교대근무와 생활을 하던 수첩군관청, 군기고와 화약고, 산성 운영과 유지에 동원했던 승군들을 위해 건립한 구룡사까지 모두 300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

영조의 흔적은 상당산성 동쪽 무쌍리 마을에도 있다. 상당산성 축조를 본격화했던 숙종은 영조의 태를 상당산성과 인접한 곳에 안장했고, 영조는 1729년 태실을 가봉했다. 하지만 이인좌의 난과 가뭄 등으로 영조 즉위 5년이 지나서야 조성할 수 있었다.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시원스러운 곳에 자리한 문의문화재단지


◇여행메모

△가는길= 청주 시내에서 512번 지방도로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국립청주박물관이다. 여기서 박물관 앞으로 난 길을 따라 3.6km 더 정도 덜어가면 상당산성 입구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600m쯤 더 들어가면 상당산성 주차장이다.

△먹을곳=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에 있는 경희식당은 한우표고버섯전골, 우렁쌈밥정식, 청국장이 유명하다. 세종시에서는 연서면 고신고복로에 있는 ‘대왕해물손칼국수’는 숨겨진 맛집이다. 이곳에서는 오낙새닭한마리가 많이 알려졌다.

△주변 가볼곳= 어린이를 동반한 여행객이라면 인근의 세종을 함께 여행하는 것이 좋다. 세종에는 베어트리파크 외에도 세종에는 베어트리파크 외에도 다양한 박물관이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여행객이라면 베어트리파크와 세종호수공원 외에도 조세박물관·교과서박물관·산림박물관 등 교육적인 공간도 많아 유용하다.

교과서박물관
조세박물관
베어트리파크 상징인 반다곰 구경에 여념없는 어린이 관람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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