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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아프리카 얘기 한 토막 더 해보자. 지난 30년간 오지를 탐험한 여행가가 있다. 그런데 그 이미지란 게 평생 여행만을 위해 살아온 그에게서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열등한 대륙이란 관념 말이다. 하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잘못을 깨달았다. 인류 삶과 문명의 모태가 된 거대한 자궁을 보면서.
여기 두 여행서로 여행을 말하는 두 사람은 인류학자와 오지탐험가다. 성격과 형태도 다르고 내용과 방식도 다르지만 두 책은 두 저자의 내공이 빛나는 여정이란 점에서 동일선상에 세울 수 있다. 로버트 고든 미국 버몬트대 인류학과 교수가 쓴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는 인간 속에 깊숙이 스며드는 여행을 말한다. 강산이 세 차례 바뀌는 세월을 거친 길 위에서 보낸 전문여행가 채경석의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은 자신을 한껏 낮춘 여행에 대해 풀어놨다. 한쪽이 인류학 원론의 관점에서 실용적 여행방법을 빼냈다면 다른 한쪽은 발밑의 지형을 더듬어 인문여행의 거대한 지점에 도달했다. 그러곤 마침내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게 여행이란 데서 합의를 봤다.
▲이미지는 여행자의 이데올로기일 뿐
인류학자의 관심은 왜곡된 여행의 이미지를 바로 잡는 데 있다. 만약 누군가에게 여행의 욕구가 생겼다면 열에 아홉은 ‘론리 플래닛’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아니었겠느냐고 묻는다. 다 좋다. 문제는 이런 ‘환상’이 현지에 대한 비뚤어진 형상을 만든다는 데 있다. 특히 ‘없는 혹은 아님’ 신화를 양산한다는 건데. 이런 거다. 유적지나 고대조각을 반복적으로 보여 그 장소와 사람을 과거로 못 박아버리는 ‘불변신화’. 파란 하늘과 하얀 백사장만 빛나는 ‘무제약신화’. 민속의상을 걸친 원주민을 앞세운 ‘미개신화’까지.
이렇게 불거진 감상 일변도엔 경계를 드러냈다. 잠재적 여행자에게 특권의식을 갖게 하는 오류가 시작되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요즘 여행자의 손에는 첨단기기까지 쥐어져 있다. 디지털 카메라와 촬영기로 무장한 여행자는 마치 박물관 직원같이 행동을 한다. 대상을 주시하기보다 빨리 기록하고 빨리 옮겨가는 식 말이다.
해법은 손에 쥔 첨단기기를 발로 옮겨놓는 것이라고 이른다. 현지조사와 참여관찰이다. 사람을 만나 눈을 맞추고 수다를 떨고 그들의 음식을 맛보는 일이 더 중요하단 뜻이다. 다른 하나는 리스트 작성. 여행에 동반케 할 목록이 아니다. 거꾸로 집에 두고 떠나야 할 목록이다. 다만 꼭 챙겨야 할 것이 있으니 실제 발로 뛰게 할 좋은 신발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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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춰야 평면이 보인다
오지탐험가가 내놓은 여행법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그가 들른 이집트는 ‘뒤돌아보게 하는’ 나라였다. 위대한 건축과 문화에 가려진 뒤태가 쓸쓸하고 안쓰러워서라고 했다. 대신 아프리카를 아프리카답게 보여준 탄자니아에선 위로를 얻었다. 문화와 전통, 언어를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결코 배타적이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봤다. 새로운 실험과 희망 덕이다.
핵심은 이들 모두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라는 거다. 과거도 현재도, 문명에 뒤엉킨 황폐까지. 결국 이해라는 건 씨줄과 날줄을 엮듯 짜낸 거대한 인문의 지형을 볼 때 가능했다.
▲여행의 키워드는 ‘이해’
인류학자처럼 여행한다는 건 한마디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거다. 제국주의 시각을 벗기고 민족적 감수성을 탈피하는 것이다. 문화상대주의를 쌓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갇힌 소비주의를 멈추는 일이다. 오지탐험가에게 여행은 왜곡과 오류를 푸는 거였다. 낮추면 평면으로 보이는데 굳이 내려다보는 입체감에 머리를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했다.
낯선 관습과 문화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 국적도 경력도 다른 두 여행가는 이 지점에서 한목소리를 낸다. 키워드는 이해였다. 여행은 이해로 몸을 깨우고 이해로 눈을 틔운 여행자에게만 보이는 묵직한 통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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