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산에 여인네의 붉은(赤) 치마(裳)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전북 무주의 적상산.
해발 1034m에서 내려다 본 산줄기는 온통 가을을 품고 있었다. 노래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아기손단풍의 바다. 그 색은 똑같은 붉은 빛깔이 아니었다. 각자의 사연들이 있는 것 마냥 저마다 다른 붉은 색을 보였다. 마치 저녁 노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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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만큼이나 붉은…
적상산은 모산(母山)이자 성산(聖山)이다. 자신을 찾는 이들을 어머니 품으로 안는다. 임성순 무주군 관광해설사는 “지난 수십년간 적상산을 찾는 등산객들 가운데 사고가 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정상인 향로봉에서는 예로부터 하늘에 제를 지냈다. 비록 지척에 있는 백두대간 덕유산(1614m)이 더 높지만 옛 선조들은 적상산의 기운이 하늘과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천년이 넘는 세월, 적상산은 단풍만큼이나 붉디 붉은 피를 흘려야 했다. 삼국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적상산은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를 잇는 군사적인 요충지이자 보급로였다.
신라와 백제가 이 산을 빼앗는 전쟁을 치렀고, 오랑캐와 왜구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 들었으며, 빨치산들은 이 곳에 숨어들었다. 적상산을 오르는 두 가지 길, 북창(北倉)과 서창(西倉)의 이름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창’은 군량미나 무기를 모아놓은 곳간을 뜻한다.
조정에서는 외세로부터 이 산을 지키기 위해 산성을 쌓았다. 그 긴 시간, 병사들의 치열한 전장이었던 적상산. 그래서 이 곳의 단풍이 유난히 더 붉은 지도 모르겠다.
적상산 오르는 길, 그 아기자기함
북창은 자동차로 올라가는 6km의 드라이브 코스다.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해발 850m의 안국사로 오르기까지 무려 31곳의 굽이를 돌아야 한다. 과속은 금물.
도로 입구에 자리잡은 내창 마을은 하루에 버스 2번 오가는 작은 마을. 20여 가구가 약초와 산나물을 캐며 산다. 인삼으로 유명한 충남 금산에서 새가 인삼씨앗을 먹고는 근방인 무주에서 변을 보는 바람에 예로부터 적상산에는 자연삼이 많다고 한다.
꼬불꼬불한 숲길을 느릿느릿 차를 몰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시야가 트이면서 커다란 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해발 850m의 산중턱에 350만톤의 물을 가둘 수 있는 저수지가 있다. 1995년 양수발전소가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인공 호수다. 저수지를 가둬버린 거대한 돌댐도 눈요기 거리다.
호수 옆 전망대의 계단 105개를 오르면 무주읍내와 덕유산 국립공원을 시원한 바람속에서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는 발전소의 물을 가둬두는 수조 역할도 병행한다.
다시 정상으로 한발짝 더 다가서면 적상산 사고(史庫)를 만난다. 성산인 까닭에 나라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책들도 이 곳으로 옮겨졌다. 국보 151호인 조선왕조실록이 일제의 강압으로 서울의 왕실규장각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300여년간 이 곳에 보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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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 근처에는 안국사가 있다. 고려 충렬왕 때 건립됐다고 하니 천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버린 고찰이다. 겉모습은 여느 사찰과 다르지 않지만 이 곳에는 호국(護國)의 역사가 깃들여 있다. 거란족과 몽골족에 맞서 산을 지켰던 승려들의 영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안국사를 빙 둘러 돌담처럼 만들어진 적상산성에는 담쟁이 덩굴이 길게 뻗어있어 오롯이 고색창연하다.
천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안국사 천불전은 일제시대 이전까지 조선 왕들의 족보가 보관됐던 선원각이었다. 안국사의 사무장인 이규평씨는 “천불전은 주춧돌을 비롯해 오백년 간 원형 그대로 보존된 건물”이라며 “들보를 조금 잘라낸 것을 놓고 문화재 지정을 못한다니 말이 안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안국사에서 300m 가량 오솔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정상 남쪽 층암절벽 위에 안렴대가 있다. 고려 당시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안렴대라 불린다.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 발 밑 저 멀리에는 무주의 작은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붉은 산 자락 사이 사이 흩어져 있는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오늘도 저녁 짓는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무주의 다른 공간들
무주 구천동과 덕유산은 계절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전국구 관광지다. 반딧불의 고장인 무주에서는 ‘반디랜드’가 자랑거리다. 이 곳에 가면 ‘말하는 건축가’ 고(故) 정기용이 설계한 곤충박물관이 있다.
1만3000여점의 곤충 표본이 있는 이 곳을 관람하고 나면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풍뎅이, 하늘소, 사슴벌레, 그리고 딱정벌레의 차이점을 배우게 된다.
특히 1억원짜리 장수하늘소와 5000만원을 호가하는 사슴벌레는 특별한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