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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황현규 신중섭 기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면서 1년에 800만원 넘는 학원비를 쓰고 있습니다. 만약 올해에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평생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잃을 판입니다.”
텔레마케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박주원(33·가명)씨는 로스쿨 졸업생 5년 차다. 박씨는 지난달 12일 5번째 변호사 시험을 치렀다. 박씨는 이번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앞으로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로스쿨 졸업생에게 최대 5번의 변호사 시험 응시 자격만 부여하는 이른바 `오탈 제도(평생시험금지제도)` 때문이다.
박씨는 변호사 시험 준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 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다. 박씨는 “응시생 절반 이상이 떨어지는 변호사 시험에서 이제 사교육은 필수가 됐다”며 “학원 강의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공부시간을 뺏기고 준비기간이 길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48%를 밑돌 것이라고 예상되는 가운데 좁은 합격문을 뚫기 위해 로스쿨 학생들이 고시 생활을 자처하고 있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학원 강의를 듣거나 점수를 얻기 쉬운 과목만 골라서 시험을 응시하는 식이다. 전문분야에 특화된 법조인을 양성하겠다는 로스쿨 목적과 상반된다는 지적이다. 현직 변호사들은 로스쿨 교육 정상화를 위한 합격자 확대·절대평가 도입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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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변호사 양성한다더니…하루 10시간 책상 앉아서 ‘달달’ 암기만”
로스쿨 재학생들은 애초 로스쿨의 도입목적이었던 `다양한 전공과 배경·출신의 변호사를 양성한다`는 의미가 사실상 없어졌다고 토로한다. 기자나 공무원·금융권·대기업·의사·약사 출신들이 로스쿨에 들어 오는 경우도 있지만 해를 거듭할 수록 전문직을 노리는 젊은 고스펙·고학벌 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어 다양성이 퇴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로스쿨 재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로스쿨이 전문 변호사를 양성하는 곳이 아닌 고시학원으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온다. 시험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학교 강의 대부분이 변호사 시험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고 학교 시험조차 변호사 시험 기출 문제를 변형해 출제된다. 올해 지방의 한 로스쿨을 졸업하는 김모(29)씨는 “교수들마저 로스쿨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은 실패했고 고시화됐다고 인정하고 있다”며 “모든 학교 시험과 강의가 변호사 시험 합격 중심으로 이뤄진다. 방학이면 학교 차원에서 서울 학원가 강사들을 불러 특강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지방의 한 로스쿨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모(27)씨도 “졸업시험 통과로 걸러진 10~20%의 학생들이 변호사 시험을 보는데 그 합격률마저 50% 아래로 떨어지다 보니 학생도 교수도 변호사 시험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며 “대부분의 학생이 변호사 시험과 관련이 없는 수업은 듣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변호사 시험을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교수에게만 수강신청이 몰리거나 아니면 학교 수업을 아예 듣지 않는다”며 “수백만원씩 들여가며 인터넷 강의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로스쿨에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매일 같이 책상에 붙어 앉아 변호사 시험만 공부하는 학생로 가득하다.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나와 강의와 스터디, 특별 강의, 인터넷 강의까지 챙기다 보면 자정은 금세 넘긴다는 것이 학생들의 설명이다. 전문 변호사 양성이라는 로스쿨의 목표와 달리 변호사 시험만을 위한 극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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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 과목으로 국제거래법 선호…“한자가 아닌 한글 조문 등 장점”
학생들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일부러 점수를 얻기 쉬운 과목을 선택한다. 학생들이 변호사 시험 7개 선택 과목 중 가장 많이 응시하는 과목은 국제거래법이다. △판례가 다른 법에 비해 적은 점 △한자가 아닌 한글 조문이라는 점 △조항이 적은 점이 국제 거래법을 선택하는 이유로 꼽혔다. 올해 로스쿨을 졸업하는 박은선(42)씨도 노동권에 관심이 많지만 변호사 시험 선택 과 목으로 노동법이 아닌 국제거래법을 선택했다. 심지어 박씨는 노동법 수업을 로스쿨 재학 중에 단 한 차례도 수강한 적 없다.
박씨는 “노동권에 조예가 깊은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변호사 시험 합격하고 보자는 생각에 변호사 시험에 유리한 과목만 선택해 수강했다”고 말했다. 이어 “판례가 많고 복잡한 노동법보다 국제거래법이 합격에 유리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박씨처럼 지난 2018년 제7회 변호사 시험 응시자 3240명 중 국제거래법을 선택한 수험생은 1404명(43.3%)에 달했다. 과목별로는 △환경법 695명(21.5%) △노동법 415명(12.8%) △경제법 309명(9.54%) △국제법 241명(7.44%) △지적재산권법 95명(2.93%) △ 조세법 81명(2.5%) 순이었다.
반면 지난 2012년 제1회 변호사 시험 당시 수험생들은 노동법을 가장 선호했다. 수험생 1665명 중 노동법을 선택한 수험생은 516명(30.99%)으로 가장 많았다. 제7회 변호사 시험 합격률은 49.35%였지만 제1회 변호사 시험 합격률은 87.25%였다. 서울 시내 로스쿨에 재학 중인 문모(29)씨는 “둘 중 한 명은 떨어지는 시험이다 보니 합격 확률이 높은 과목만 선택한다”며 “나의 적성·관심사 등은 다 무시하고 오로지 시험만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스쿨 고시화 설립 목적에 위배…“절대평가 도입 등 고민해야”
이런 로스쿨의 고시화는 애초 로스쿨 설립 목적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로스쿨은 △국민의 기대 부흥 △다양한 법적 분쟁 시 전문적인 법조인 양성 △법조인의 풍부한 교양을 위해 설립됐다. 기본 사법고시 시험이 일편·일률적인 법조인을 양성한다는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미 고시화된 로스쿨에서 다양한 성향을 지닌 법조인이 나오기 어렵다는 점이다. 로스쿨 1기 졸업생인 최모 변호사는 “로스쿨 재학 당시 합격에 대한 부담이 없다 보니 자신이 관심있는 과목 위주로 수강 신청을 했다”며 “로스쿨 때 들었던 인권·문화 관련 과목들이 변호사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현재 장애인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 변호사는 “수험생들이 높은 합격 문턱을 넘기 위해 아등바등 시험 공부만 한다면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변호사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전북대 로스쿨 2기 출신 김성환 변호사는 합격자 확대나 절대평가 도입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 변호사 시험은 로스쿨 제도의 취지와 양립 불가능하다”며 “단계적으로 합격률을 올려가면서 교육의 정상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궁극적으로 절대평가 도입까지 고려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