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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낙찰총액 490억원. 좀더 정확하게는 489억 6886만원이다. 올해 상반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을 결산한 수치다. 이 정도면 완전히 주저앉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490억원은 최근 5년 정도만 놓고 볼 때도 가장 적다. 낙찰총액이 가장 많았던 2018년 상반기 1030억 1500만원은 물론, 두 번째이던 2017년 상반기 988억 3400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난해 상반기 825억 7800만원에 비해서도 40%가량이 감소했다.
그래도 믿을 구석은 하나 있다. 낙찰률이다. 올해 상반기 낙찰률은 64.49%. 지난해 65.81%, 2018년 68.76%, 2017년 67.94%에 비해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총 출품작 1만 4224점 중 9173점이 낙찰됐는데. 이들 수치만 비교하면 오히려 지난해(출품작 1만 2458점, 낙찰작 8199점)나 2018년(출품작 1만 2820점, 낙찰작 8815점)보다 낫다. 역으로 올해 경매시장 경기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를 가늠케도 하지만.
이미 엄청난 부담감을 끌어안은 미술품 경매시장이 하반기 첫 메이저 장을 연다. 케이옥션이 1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경매장에서 ‘7월 경매’를, 서울옥션이 16일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 경매장에서 ‘제32회 서울옥션 홍콩세일’을 예고했다. 양일에 걸쳐 벌릴 판은 200점 204억원 규모. 케이옥션은 125점 130억원어치를, 서울옥션은 75점 74억원어치를 각각 내놨다.
사실 이번 ‘서울옥션 홍콩세일’은 상반기에 진행했어야 할 경매가 미뤄진 것이다. 홍콩에선 순회전만 개최하고 경매는 서울에서 열기로 했다. 어찌 보면 상반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이 예년에 비해 대폭 하락한 데는 ‘코로나19’ ‘홍콩소요사태’로 인해 서울옥션이 해외경매를 진행하지 못한 탓이 크다. 그만큼 ‘서울옥션 홍콩세일’이 국내 경매시장을 주도해온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던 거다. 실제로 홍콩에서 거래한 서울옥션의 상반기 낙찰총액은 지난해 241억원, 2018년 290억원, 2017년 221억원이며, 2016년에는 476억원에 달한다.
하반기 첫 장을 기대하는 분위기는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양일간 경매에 나설 ‘거물급 출품작’이 대기 중이다. 케이옥션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을 내놨다. 2013년 보물 제1796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지난 5월 간송미술관이 출품했던 ‘신라금동불상’에 연이은 ‘보물 문화재’의 출현으로 이미 세간의 관심을 한참 끌어올려놨다. 낮은 추정가로 볼 때 ‘간송 불상’(2점 각각 15억원)보다 3배 이상 비싸게 출품한 ‘가치’도 화젯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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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옥션은 쿠사마 야요이(91)로 승부를 건다. ‘호박’ ‘땡땡이’ 등으로 유명한 쿠사마의 대작회화 ‘소울 버닝 플래시스’(Soul Burning Flahes·1988)다. 쿠사마는 올해 상반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최고 낙찰가를 꿰찬 작가다. ‘인피니티 네트’(Infinity-Nets OWTTY·2007)를 14억 5000만원에 팔았다.
△겸재 화첩, 낙찰만 되면 고미술품·보물 순위 뒤바꿔
추정가 50억∼70억원. ‘겸재 화첩’이라 불리는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은 일단 낙찰이 되면 ‘국내 미술품 경매 고미술품 순위’뿐만 아니라 ‘보물 경매 순위’까지 단숨에 바꿔버릴 수 있다. 지금껏 고미술품 최고 낙찰가는 2015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 2000만원에 팔린 ‘청량산괘불탱’(보물 제1210호)이 보유하고 있다. 2위는 2012년 케이옥션 경매에서 34억원에 낙찰된 ‘퇴우이선생진적첩’(보물 제585호). 3위를 기록하고 있는 ‘고미술품 순위’와 ‘보물 순위’는 갈린다. 고미술품에선 2019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1억원에 팔린 ‘백자대호’가, 보물에선 2015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18억원에 낙찰된 ‘의겸등필수월관음도’(보물 1204호)가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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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매에 나온 ‘겸재 화첩’에는 총 16점이 들었다. ‘단발령’ ‘비로봉’ ‘혈망봉’ ‘구룡연’ 등 금강산과 주변 동해안 명소를 그린 진경산수화 8점의 ‘해악팔경도’와 ‘염계상련’ ‘방화수류’ ‘부강풍도’ ‘하외소거’ 등 중국 송나라 유학자의 일화·글 등을 소재로 그린 고사인물화 8점의 ‘송유팔현도’로 가름한다.
보물 지정 이전에는 화첩 표지의 먹글씨를 따라 ‘겸재화’(謙齋畵)로 불렸다. 정확한 제작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겸재의 노년기 작품으로는 짐작케 한다. 그림마다 ‘겸재’(謙齋)란 서명과 함께 정(鄭)·선(敾)을 각각 새긴 두 개의 백문방인(白文方印: 글자 부분이 하얗게 찍히는 도장)이 찍혔는데. 이는 겸재가 66세(1741)부터 70대 후반경까지 사용한 도장이다.
‘겸재’를 앞세운 이번 케이옥션 경매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작가는 이우환(84)이다. 이우환은, 수년간 톱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김환기를 밀어내고 올해 상반기 작가별 낙찰총액 1위를 차지했다. 92점을 출품해 72점을 낙찰시켜, 총액 61억 2000만원(낙찰률 78.26%)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달리고 있다. 이번에 출품한 작품은 ‘점으로부터 No.770100’(1977)다. 거친 질감을 그대로 노출한 얇은 캔버스에 별다른 특색 없이, 튜브에서 바로 짜낸 듯한 흰 물감을 규칙적으로 찍어내 물질에 대한 감각을 먼저 일깨우는 작품이다. 추정가 9억∼20억원을 걸고 새 주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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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최고 낙찰가 작품 낸 쿠사마 대작 주목
이번 서울옥션 홍콩세일에서 가장 비싸게 나온 작품은 쿠사마의 ‘소울 버닝 플래시스’다. ‘호박 작가’란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쿠사마는 “현존하는 여성작가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은 성과를 연이어 만들어내는 중이다. ‘호박’ 연작 외에도 ‘무한 그물망’ ‘거울 방’ 연작으로 애호가는 물론 대중의 선호를 이끌고 있다.
이번 경매서 나선 ‘소울 버닝 플래시스’는 가로 130.6㎝, 세로 190.4㎝의 캔버스 세 개를 연결한, 가로 4m, 세로 2m에 육박하는 대작이다. 작가의 특기라 할, 무한히 확장하는 그물과 물방울을 한 화면에 압축했는데. 붉은 바탕에 검은 물방울이랄지, 검은 바탕에 붉은 그물이랄지, 이를 사랑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으로 표현했다는 그림이다. 추정가 28억 5000만∼40억원을 걸고 응찰자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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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윤형근·김창열 등 한국 근현대 마스터 작가의 대표작도 나선다. 토속적 서정을 거친 질감에 예외없이 녹여낸 박수근의 ‘고목과 여인’(1963·추정가 2억∼3억원), 무위자연의 한국 정서를 암갈색으로 표현한 윤형근의 ‘번트 엄버 & 울트라마린 2000-#13’(2000·1억 3000만∼2억 4000만원), 흐르지도 번지지도 못하는 한 점 물방울을 압축하듯 박아놓은 김창열의 초기작 ‘물방울’(1975·1억 5000만∼3억 2000만원) 등이 숨죽인 채 순서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