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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 3·1운동①]행촌동 ‘흉물’ 잊혀진 3·1운동의 목격자

이정현 기자I 2019.01.31 06:00:00

3·1운동 전세계 타진한 외신기자의 집
독특한 양식에 독립운동사 의미 실어 등록문화재로
수십년간 방치되다 최근 복원 공사 진행中

22일 서울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의 모습.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개축한 부분을 뜯어내고 건립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3·1운동 100년을 기념해 올해 중 일반에 개방할 예정이었으나 거주민과의 소송으로 늦어졌다. 서울시는 2020년 7월까지 복원 및 보강 공사를 끝낸다는 계획이다.(사진=이정현 기자)
[이데일리 이정현 기자] 2019년은 3·1운동, 임정 100년을 맞는 해다. 서울에서 찾은 3·1운동, 임정 100년의 흔적을 찾아 모두 1월부터 6회에 걸쳐 매달 연재한다. 최초 독립선언문 낭독과 3·1운동의 출발점이 된 탑골공원(사적 354호)부터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선생 집무실인 경교장(사적 465호),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장르이자 지도자를 배출한 서울중앙고등학교(사적 281호) 등 ‘우리 곁에 3·1운동’을 찾아간다.<편집자 주>

‘딜쿠샤’는 오랫동안 잊혀진 집이었다. 행촌동 언덕에 자리잡은 서양식 빨간 벽돌집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갔다. 지금은 없어진 일제강점기 때 신문사 사옥이었다 카더라. 아니라더라.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근처 주민들은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불렀다. 삐거덕 거리는 창틀을 넘어 집 없는 이들이 몰렸고 10여가구가 살았다. 그곳에 있으나 왜있는지 모르는 낡은 집. 도시의 흉물이었던 이곳은 2005년에 와서야 제 이름을 찾았다. 장독대를 걷어낸 자리에서 찾은 머릿돌에서 ‘DILKUSHA’라는 이름을 찾으면서다. 수십년의 시간을 지나 ‘빛나는 궁전’이 돌아왔다.

△잊혀진 궁전 ‘딜쿠샤’를 아시나요?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살았던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짓고 살았던 집이다. 사업가이자 AP통신 기자였던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과 독립선언서를 기록하고 외국에 알렸다. 일제에 저항한 한민족의 의지를 세계에 전한 최초 사례다. 이후 테일러 부부는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다. 딜쿠샤도 이때 주인을 잃었다.

딜쿠샤의 정체가 밝혀진 건 우연이다. 미국에 살던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어릴적 살던 집을 찾는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그가 기억하는 건 집 옆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성곽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은행나무에서 이름을 따온 ‘행촌동’이 시작이었고 그곳에 방치된 서양식 건물이 딜쿠샤라는게 밝혀졌다.

직접 딜쿠샤를 찾았자. 행촌동에서는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찾는게 빠르다.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수령 400년의 나무다. 사직터널 위로 우뚝 솟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독립문역 사거리를 지나 광화문으로 가는 방향, 나무를 바라보며 야트마한 언덕을 걸어 오른다. 터널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빙글 둘러 가야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막다른 길이라 처음 가는 길이라면 헷갈릴 수 있다. 문화재로서 정비가 되지 않아 표지판도 찾기 힘들다.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안전 펜스 너머로 지켜봤다. 입구는 막혀있고 군데군데 토사가 쌓여있다. 작은 굴삭기와 빗자루를 든 인부들이 흙을 쓸어냈다. 화장실로 쓰려고 붙여놓은 하얀 욕실타일을 뜯어내니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문이 나왔다. 얼기설기 붙여놓은 판자를 덜어내면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을게다. 이 집을 지었던 부부가 가꿨던 정원의 흔적도 기대해본다.

테일러 부부가 살던 시기의 딜쿠샤.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해 현재 기획전시중이다. ‘행촌동’이란 이름의 기원이 된 은행나무가 건물 뒤편으로 보인다.(사진=서울역사박물관)
△3·1운동 100년 복원 불발… 그래도 시민 품으로

딜쿠샤는 1923년에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조선신궁보다 높은 곳에는 건물을 지을 수가 없어서 그보다 낮은 위치에 지었다. 지하1층~지상2층 건물로 지하는 창고로 활용됐고 1층에는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거실, 주방 등이 있었다. 한반도의 또렷한 사계절을 반영해 응접실엔 큰 창을 달았으며 추위를 피하기 위한 벽난로도 있다. 1926년 낙뢰로 인해 가옥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테일러 부부는 이곳에서 25년간 살았다.

딜쿠샤는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한 외국인이 살았던 공간이자 독특한 양식으로 건축사적으로도 가치있다. 1963년 국가 소유가 되었으나 정부의 방치로 상당부분이 훼손된 안타까운 경우다. 2016년 서울시를 중심으로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종로구 등과 보존과 관리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으며 이듬해 8월 등록문화재 687호로 지정했다.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던 딜쿠샤는 조금씩 제 모습을 찾는 중이다. 애초 3·1운동 100년을 맞아 복원을 마친 후 2019년 3월1일에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딜쿠샤에 살던 불법 거주민의 퇴거가 늦어지면서 틀어졌다. 딜쿠샤가 1963년 국유화된 후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건물을 무단 점유한 이들이다. 소송 끝에 지난해 8월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지붕은 방수포에 덮였고 가스관과 전깃줄이 아직 복잡하게 얽혀있으나 본모습을 짐작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누군가 붙인 기차 모양 스티커도, 낙서들도 이제는 벗겨낸다. 외형을 갖추면 내부도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한다. 테일러 부부가 쓰던 가구와 소품도 복제 등의 형태로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꼭 100년 만이다.

새단장 중인 딜쿠샤는 2020년은 지나야 복원한 내외부를 일반에 공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사 전 정밀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은 만큼 건축물 보강 공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서울시 문화본부 역사문화재과 관계자는 이데일리에 “내년 7월까지로 공사기간을 정하고 복원 공사를 진행 중”이라며 “거주민의 퇴거가 늦어지면서 공사가 늦어졌으나 새로운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2020년까지 복원을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사직터널 위로 돌아 딜쿠샤로 가는 길. 독립문 사거리에서 딜쿠샤 까지 가는 길에서 만난 유일한 안내판이다. 흰색 현대식 건물 뒤로 딜쿠샤의 일부 벽과 은행나무가 보인다.(사진=이정현기자)
딜쿠샤로 가는 언덕길. 딜쿠샤를 끝으로 막다른 길이라 지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딜쿠샤 앞으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바깥에서 발견하기 어렵다.(사진=이정현기자)
딜쿠샤의 과거 모습(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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