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으로 살펴본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경영스타일
저렴한데 오래둬도 변하지 않는 위스키로 실용 추구
소주, 와인까지 안 가리는 애주와 절주 사이 절제미
`미원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스스로에 대한 `진심 애주`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커머셜 대표이사 부회장의 경영과 인생을 술로 이해하는 건 흥미롭다. 현대가 사위로서 계열사 부회장에 오르기까지는 처가의 혹독한 두주불사(斗酒不辭)식 트레이닝을 거쳤을 테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장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으로 이어진 가풍(家風)과 사풍(社風)에서 애주를 지향하고 절주와 타협했으리라. 한창때 그를 가까이서 겪은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 자리에서 소주 수병을 너끈히 비웠다고 한다. 지금보다 소주 도수가 10도 가까이 높았던 시절 얘기다.
| 정태영(오른쪽) 현대카드 부회장이 지난 4월29일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왼쪽부터 배우 정우성, 이정재, 스티븐 던바 존슨(Stephen Dunbar-Johnson) 뉴욕타임스 사장과 술자리에서 자기 앞에 언더락 잔을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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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접어들면서 소주보다 독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가까이 둔다. “내 성격에는 호기심, 낙관주의, 허무주의가 섞여 흐른다. 이들이 밀당을 주고받으며 나를 이끈다. 이들이 길목에서 엉키면 위스키 한잔이 모든 것을 차분히 정리한다.”(2021년 11월11일 페이스북·이하 인용구는 페이스북)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술집이 일찍 문을 닫아 애를 태웠다. 홀로 마시기에 적당한 위스키를 즐길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였다.
사실 그 어떤 술이 혼술에 최적화하지 않은 게 있으랴. 그러나 술을 마시는 장소와 주량을 따져보면 위스키만한 것도 없다.(편의점 노상 테이블에서 컵라면에 소주를 마시기도 하지만) 체면상 혼자서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기도 여의찮다. 그럴싸한 데를 가더라도 와인은 한번 열면 홀로 마시기에 양이 부담된다. 여기서 성격이 나온다.
위스키는 독해서 한 자리에서 한 병을 말끔히 비우기는 부담이다. 남은 건 보관해야 하는데 잘 두면 몇 달이고 맛이 난다. 와인은 다르다. 열면 되도록 당일에 마시는 게 상책이다. 며칠 안에 맛이 상한다. “(위스키는) 와인처럼 한번 열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고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형식과 허울을 멀리하고 실용과 내용을 따르는 경영 스타일과 닿아 있다. `두고 맛을 음미한다`는 데에서 애주와 절주 사이 놓인 절제미도 엿보인다. “위스키는 와인처럼 섬세한 감별법을 요구하지 않으니 쉽다”는 지론도 마찬가지다.
|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지난해 12월31일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한해 마지막 날을 소주를 벗삼아 마무리하고 있다. (사진=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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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스키가 `쉽다`는 게 와인보다 `낫다`는 의미는 아닐 테다. 사실 위스키나 와인이나 산지와 양조기법에 따라 맛이 갈린다. 와인의 포도와 위스키의 보리가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기에 제조연도를 큰 변수로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맛은 끝 간데없이 분화하고, 개중에 술은 기호가 선명하다. 그러니 여기서 어떤 술이 `더 섬세하고 덜 섬세한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아울러 그가 애초 와인 애호가였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의 전향을 부추긴 게 술값이라는 것은 눈이 간다. 2000년 전후로 와인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원인은 여럿인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게 근원이라면 근원이다. 와인 생산은 한정돼 있어 갑자기 공급을 늘리기 어렵다. 즐겨 찾던 와인에서 내려 위스키로 환승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시차를 두고 가격이 올랐을 뿐이다. 코로나19가 터지고 위스키 수요가 활황 사이클을 탔다. 가격이 급등했고 “위스키 값이 올라서 부담”이라는 토로가 잦아졌다.
|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이달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미원을 곁들여 위스키를 마시는 모습이다.(사진=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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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대는 애주 세포에 이끌려 떠난 다음 행선지는 조미료 `미원`이다. 미원과 술이 무슨 상관인지 난데없다. 그러나 애주가와 호주가들 사이에서 정태영식 미원 주조법은 꽤 인기다. 위스키를 마실 적에는 미원을 섞어 맛을 내는 것이다. 미원을 요리에 쓰면 감칠맛이 폭발하듯, 위스키와 만나면 풍미를 끌어올리는 일종의 `치트 키`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정 부회장은 다만 “제가 좋아하는 위스키가 없으면 그냥 아무 위스키나 가짜 에이징(숙성) 효과를 만들어서 부드럽게 마시자는 것이지 더 맛있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 스스로 미원을 섞는 음용법을 `생계형 음주`라고 부른다.
|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2019년 3월 인스타그램에 올린 위스키와 미원의 조합.(사진=인스타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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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유난스럽다. 사실 풍미가 가득한 위스키를 즐길 그의 안목과 재력, 구매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테다. 그럼에도 미원까지 품고 다니는 사정을 헤아려보면, 스스로에게 꾸준히 술을 권하는 면모에서 경지에 오른 주도(酒道)가 느껴진다. 애주가라 불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