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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한순간 시원하게 내리는 소나기처럼 물줄기가 쏟아진다. ‘이대호’ ‘한일전’ ‘테러’ 등 셀 수 없이 많은 물방울이 짧은 순간 글자를 이뤘다가 흩어져 내린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실제로 물방울이 단어모양으로 쏟아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매번 단어는 바뀐다.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영어, 인도어, 아랍어, 불어, 영어 등 8개 나라의 언어가 물줄기에서 형상화되다가 사라진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9월 4일까지 열리는 ‘대한항공 박스 프로젝트 2015’의 ‘비트.폴’(Bit.Fall)은 예술작품이라기보다 거대한 ‘기계’를 보는 듯한 작품이다. 골조만 남겨 사방이 뚫려 있는 4개의 컨테이너를 4층으로 쌓아올린 뒤 컨테이너마다 물줄기를 커튼처럼 흘러내리도록 분사하는 장치를 설치했다. 각 컨테이너마다 200ℓ의 물을 순환시켜 규칙적으로 떨어뜨린다. 모터가 움직이며 내는 기계음과 물이 ‘쏴악’하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묘한 공명을 이루며 마치 공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작품을 만든 율리어스 포프는 독일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다. 뉴욕 현대미술관(2008), 리옹 현대미술관(2008), 빅토리아&알버트 미술관(2009)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특히 2012년 런던올림픽을 기념하는 작품 ‘비트.폴’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서울관에 설치한 포프의 ‘비트.폴 펄스’(Bit.Fall Pulse)는 데이터의 최소단위인 정보조각(bit)이 쏟아지며(fall) 짧은 순간만 존재할 수 있는 정보의 일시성과 빠르게 전파하는 정보의 활발한 맥(pulse)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물줄기로 형상화한 단어들은 인터넷 뉴스에서 실시간으로 추출한다. 포프는 “온라인에서 흘러가는 정보의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정보의 이미지를 시각화해 자연의 순환, 문화의 순환에 주목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품을 설치한 컨테이너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포프는 “컨테이너라는 틀을 통해 글로벌 체제나 무역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며 “컨테이너가 가진 이미지를 통해 교역이나 문화교류 등에서 떠올리는 모습을 작품 속에 중첩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황윤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율리어스 포프의 작품은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며 “포프는 디지털시대에 정보와 인간의 상호관계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는 작가”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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