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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지평선 위에 항아리 둥그렇게 앉아 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 쌍이다/ 똑/ 닭이 알을 낳듯이/ 사람의 손에서 쏙 빠진 항아리다”(김환기 ‘조선백자 항아리’).
김환기(1913∼1974)는 평생 항아리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 차라리 ‘미쳤다’고 봐야 할 거다. 항아리의 매력이 뭐냐고 스스로 질문하곤 ‘한마디로 아름다워서’라고 스스로 답했다. 그래놓고도 성에 안 찼나 보다. 왜 아름다운 건지, 어디가 어째서 아름다운 건지, 이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건지 등을 캐묻고 캐물었다. 다행인 건 나름의 답은 찾은 듯 보인다는 것. ‘평범’이었다. “조선항아리는 철두철미 평범하다. 평범한 우리 생활기이다”라고 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환기는 글쓰는 작가로서의 면모도 기꺼이 과시했는데. 조선항아리를 향한 진한 탐닉은 ‘신천지’에 실린 앞의 시에서도, 그의 에세이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도 뭉글뭉글 피어난다. 화가의 글이 이 정도일 때야 정작 그림은 어땠겠는가. 원체 다작작가인 김환기에게 달항아리는 늘 솟구치듯 뿜어 오르는 영감의 원천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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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백자를 향한 ‘미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 펼쳐놓은 ‘백자예찬: 미술, 백자를 품다’ 전이다. ‘항아리와 꽃가지’(1957),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1956), ‘정원’(1956) 등 여덟 작품이 걸렸다. 그중 가장 특별한 건 ‘섬 스케치’. 1940년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작품은 국내서 처음 공개된 것이다. 반백년간 한국을 떠나있던 것을 미술관이 지난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들여 이번에 소개했다. 고향 안좌도를 배경으로 아낙들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풍경. 추상의 거장답게 단순화한 붓끝에 맡긴 소박한 달항아리는 이 전경 안에서도 둥실둥실 떠 있다.
백자에 미친 이는 김환기뿐이 아니었다. ‘도자기의 샘’이란 뜻으로 호를 도천이라 지은 도상봉(1902∼1977)도 있다. ‘달항아리 작가’라 불리길 좋아했다는 도상봉은 그가 즐겨 그린 정물화 안에 자주 백자를 세워 중심을 잡았다. 1950~60년대 서울 충무로에 도자기가게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는 그는 조선백자가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은 ‘지킴이’기도 했다. 전시에선 ‘정물’(1954)을 비롯해 ‘백자 항아리’(1967), ‘라일락’(1968) 등 다섯 점을 선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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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한 사람만 더 꼽으라면 구본창(61)이다. 4개국 16개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백자란 백자는 모조리 사진에 담아온 이다. 이번 전시에 옮겨다 놓은 작품은 ‘베셀(HR 02-1)’(2006)과 ‘베셀(KRO 01)’(2004). 각각 한 가로와 한 세로 길이가 150㎝를 넘기는 거대한 패널 안에 우아한 듯 단단한, 오묘한 빛을 품은 도자기그릇 두 점이 오롯이 박혔다.
백자를 소재로 한국 근·현대 미술품을 모은 이번 전시는 ‘스미다’ ‘번지다’ ‘이어지다’를 테마로 한다. 김환기·도상봉을 앞세워 손응성이 그린 백자정물, 박서보·정상화가 추상어휘로 포장한 백자미학 등이 ‘스미듯’ 뿌리를 내린 한국회화를 보인다. 2000년 이후 확장된 백자 모티브는 구본창의 사진으로, 고영훈·강익중의 그림으로, 박선기·황혜선 등의 설치로 ‘번져’ 나갔다.
옹기 그대로의 백자형상은 옛 장인의 철학과 조형미로 현대 도예명장들의 투박한 손끝에 ‘이어지고’ 있었다. 한익환·박영숙·박부원·권대섭의 전통, 김정옥·김익영·백진 등의 응용을 한눈에 들인다. 여기선 한평생 조선백자 복원에 바친 한익환의 ‘백자호’(연도미상)라도 달항아리에 감히 여덟 개의 주름을 잡은 김정옥의 ‘팔각호’(연도미상)를 결코 내치지 않는다.
27명 작가가 정갈하게 내놓은 무취색의 56점에 취할 만큼 취했다면 미술관 후정으로 가보는 것도 좋다. 푸름이 짙어가는 석파랑 앞마당에 설치된 김병진의 ‘포터리-러브’는 이번 전시가 주는 유쾌한 덤이다. 화려한 붉은색의 달항아리. 백자는 그 반전도 강렬했다. 8월 31일까지. 02-39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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