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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송승현 기자] ‘법원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핵심 피고인들의 재판이 진행되면서 서초동 법조타운에는 이런 뒷말이 나오고 있다. 검찰 측이 청구한 구속영장 심사나 압수수색 관행에 법원이 예전보다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서다.
실제 구속영장 기각률은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전과 비교해 약 3.3% 포인트 상승했고, 위법하게 압수한 증거를 재판에 쓸 수 없다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인신 구속 수사와 재판상 원리 원칙에 부합하는 당연한 것이지만, 일각에서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재판을 염두에 둔 ‘사전 포석’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사법농단’ 수사 후 높아진 영장기각률…깐깐해진 영장심사
6일 법원 통계에 따르면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시작한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서울중앙지법에 청구된 구속영장 가운데 기각 비율은 평균 21.92%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1월부터 수사 시작 이전 평균 기각률 18.61%와 비교하면 3%포인트 이상 높아진 수치다.
특히 지난해 9월 유해영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후 기각률이 크게 높아졌다. 유 변호사는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으로 일하면서 취득한 수만 건의 기밀문건 파일을 퇴직하며 반출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었다.
허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당시 이례적으로 200자 원고지 18장에 이르는 장문의 기각사유를 밝혀 주목을 끌기도 했다. 영장전담판사 출신의 A 변호사는 “검찰이 청구한 영장이 그만큼 엉망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고, 검찰 내부 인사가 있던 지난 2월(13.29%)을 제외하면 지난해 7월부터 지난 5월까지 영장 기각률은 전체 평균 19.3%(2014~2019년 5월)를 모두 웃돌았다.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기간 영장 청구(평균 226.7건)가 수사 이전(275.2건)보다 적었다는 점에서 법원이 구속영장 심사를 깐깐하게 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A 변호사는 “검찰의 수사를 여러 방법으로 직접 체험한 판사들이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영장기각률이 높아진 것은 사법행정권 남용 당시 청구됐던 영장 이후 더 깐깐하게 영장심사에 임하고 있는 탓이 크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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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심사 외에도 검찰의 압수수색 관행에 대해서도 돋보기 잣대를 들이대는 추세다.
‘강원랜드 채용 비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 재판부는 판결문 94~97페이지에 걸쳐 검찰의 위법 압수수색을 지적하며,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영장에 기재된 혐의 사실 또는 그와 관련된 범죄를 증명하기 위한 간접증거나 정황증거로 단정할 수 없다”며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는 점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고법 형사2부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방위사업체 A사 직원 6명의 재판에서 압수수색의 위법성을 문제 삼아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와 관련,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지난달 별도 보도자료를 통해 “검찰이 사무실과 이메일을 압수수색할 당시 제시한 영장 범죄사실에 기재된 피의자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다”며 “압수된 이메일 자료도 피의사실과 관련된 전자정보도 아니어서 ‘별건 압수’에 해당한다”며 비판에 동참했다.
검찰은 이같이 법원 기류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검찰 한 관계자는 “전보다 구속영장 기각 사례가 늘어난 것은 피부로 체험하고 있다”면서 “법원 스스로 그 이전의 심사는 잘못 됐다고 인정하는 ‘자기부정’인 셈”이라고 꼬집었다.
압수수색과 관련한 잇단 위법 판결에 대해서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양 전 원장 등이 (재판에서) 같은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며 “왜 이 시기에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마치 사법농단 재판 피고인들을 옹호하는 듯 ‘치어리딩’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