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경기장에서 응원가로 종종 불리는 ‘아파트’는 그 정서가 전혀 다르다. 가사 중간 중간에 ‘으쌰라으쌰 ’ 같은 추임새를 붙여 더 힘찬 느낌을 더해 넣는 이 버전의 ‘아파트’는 가사의 의미를 잊어먹게 만들 정도의 흥이 묻어난다. 어째서 ‘아파트’라는 본래 쓸쓸함과 그리움에 대한 노래가 이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으쌰라으쌰 ’하는 흥의 노래로 변모했을까. 혹 이 변모의 과정에는 ‘아파트’라는 공간이 주는 양면적인 느낌이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강남의 몇 평대 아파트를 갖느냐가 사회에서의 성공 척도가 되고, 누구나 그 아파트를 갖고픈 열망이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아파트들이 여기저기 기존의 낡은 집들을 밀어내고 올려지던 그 때는 노력에 의해 그걸 가질 수 있다는 희망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힘들어도 하루하루를 ‘으ㅆㅑ 으ㅆㅑ’하던 그런 시절. 하지만 그렇게 도시가 아파트로 가득 채워질 정도로 늘어난 현재는 어떨까. 아무리 ‘으쌰라으쌰 ’ 해도 도심은커녕 변두리 아파트 한 채를 갖기가 어려워졌다. 수십 년을 빚쟁이로 살아야 겨우 얻을까 말까 한 공간. 쓸쓸한 건 기다리던 ‘너’가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고 ‘희망’이 없어서다. 아파트는 저 윤수일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흥과 쓸쓸함이 교차하는 양면적인 공간이 됐다.
아파트에 입주한다는 건 그래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건 성공했다는 것이면서, 이 생존경쟁의 정글 속에서 드디어 등 비빌 공간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콘크리트로 갈수록 높게 담장이 세워지는 공간은 그 안과 밖을 구별한다. 아파트는 이 안과 밖의 경계를 더 분명히 구별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초창기의 아파트가 복도식으로 적어도 같은 층에 10여 가구가 함께 사는 느낌을 줬다면, 요즘 아파트인 계단식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두 세 집이 마주하는 방식으로 이웃과의 접촉을 최소화한다. 또 과거의 아파트가 수위 아저씨를 동마다 두고 드나드는 이들을 대면으로 접촉했다면, 지금의 아파트는 들어가려면 카드키나 비밀번호를 찍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식으로 무인 운영 관리되는 비대면이 됐다. 물론 고급 아파트들에도 수위 아저씨들은 존재하지만, 주민과의 접촉은 더욱 더 철저한 갑을 관계로 바뀌어 종종 사회면을 장식하는 주민의 갑질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복도식에서 계단식으로 또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나아가 안과 밖을 철저히 경계 짓고 구분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온 아파트의 변화는 단지 공간의 변화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공간은 삶을 바꾸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꾼다. 아니 어쩌면 거꾸로 사람들이 달라져 공간이 그런 형태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요는 이렇게 공간으로 매일 같이 부지불식간에 안과 밖을 나누는 삶에 익숙해지다 보면 삶도 사람을 구분 짓고 구별 짓는데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과거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다닥다닥 붙어 살았던 시절의 풍경을 떠올려 보라. 이웃과의 관계는 확실히 달랐다. ‘응답하라1988’이 그려낸 바 있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이웃’은 완전한 타인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말 그대로의 ‘이웃’의 의미가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의 시선을 의식해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골목을 잃어버렸다. 아파트의 등장은 주거공간만 바꾼 게 아니라 우리의 삶도 바꿔 놓았다.
엄태화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러한 아파트 공화국이 된 한국사회에 대한 풍자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뒤집어 놓은 대지진과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황궁아파트라는 공간을 통해 그려냈다. 극단적인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멀쩡하게 유지되던 세계에서는 흐릿했던 우리네 아파트 공화국의 진면목을 선명하게 끄집어낸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구호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는 당연한 말처럼 여겨지지만,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는 주민이 아니면 나가라는 ‘배제의 의미’를 담는다. 그리고 추운 한 겨울 아파트로부터 쫓아내는 배제는 사실상 죽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방조적 살인이나 다름없다. 또 주민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룰을 정하고 바깥으로 나가 무너진 건물 속에서 먹을 음식이나 연료 같은 걸 가져오는 행위는 그들에게는 생존행위지만, 그건 아파트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때론 약탈 같은 의미를 가진다. 황궁아파트의 주민들을 위한, 주민들에 의한, 주민들의 자치적인 삶은 그들 안에서는 바깥과 비교해 유토피아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들 역시 저 무너진 바깥 세계와의 연결고리 없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건 가짜다. 그걸 유토피아로 만드는 건 저 바깥과 이 곳은 단절되고 나뉘어 있다는 막연한 믿음(사실은 거짓이지만) 때문이다. 그건 콘크리트로 세워져 가려짐으로 만들어진 믿음이다.
구분 짓고 구별 짓고 그래서 바깥의 삶과 안의 삶은 다르다는 걸 애써 보여주려는 이 콘크리트로 세워진 유토피아는 그래서 허망하다. 혼자만 잘 살자는 건, 모든 게 연결된 ‘컨넥티드’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삶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황궁아파트의 대표가 되어 주민들을 이끄는 영탁(이병헌)이 아파트 잔치에 불려 나와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는 그 장면은 그래서 기묘한 양면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처럼 착각하며 그 욕망을 실현시킨 자들인 주민들의 ‘으쌰라으쌰 ’하는 추임새와 더해져 한껏 흥을 돋우지만, 어딘가 텅 빈 눈의 영탁에게서는 허망함을 예감한 듯한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 쓸쓸함은 아마도 콘크리트로 가려진 채 애써 주장하는 유토피아가 사실은 디스토피아라는 걸 그도 우리도 이미 알고 있어서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으쌰라으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