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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법관은 책 앞에서 죄인이다. 민 전 대법관은 이데일리와의 ‘명사의 서가’ 인터뷰에서 “본업에 쫓겨 책을 작심해서는 읽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작년 대법원에 접수된 본안사건은 3만7652건이다. 대법관 한 명당 3137건이 돌아갔다. 휴일 없이 일해도 하루에 8.6건을 선고해야 한다. 민 전 대법관이 지난 9월 퇴임사에서 ‘업무량이 살인적’이라고 쓴소리를 날린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도 ‘바쁜 것’과 ‘시간이 없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민 전 대법관은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망중한(忙中閑)을 주로 독서로 채웠다. 비록 작심하고 책을 읽지 못했어도 틈이 날 때마다 책을 펴들었다. 민 전 대법관이 자신있게 권하는 책이 ‘탈바꿈의 동양고전’이다. 그는 “동양고전의 진수를 압축해서 담았다”고 평가했다.
민 전 대법관이 고전과 함께 즐겨 읽는 게 판소리 사설(辭說·창을 쉬는 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읽어나가는 대목)이다. 판소리는 소리를 직접 하거나 듣는 게 일반적이지만 읽어도 된다. 유명한 판소리 애호가인 민 전 대법관은 집무실에서 사설을 정리한 판소리 교주본을 틈 날 때마다 탐독한다.
민 전 대법관이 고전과 판소리를 애독하는 이유는 이들이 수백, 수천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여지껏 살아남은 때문이다. “고전이 고전으로만 머물면 죽은 것이지만 지금도 읽힌다. 수백 년 전 불린 판소리에는 오늘날 우리의 희로애락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