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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내리쬐는 햇살따라, '백제의 미소'를 좇다

강경록 기자I 2020.06.19 04:00:00

충남 서산 용현계곡의 마애여래삼존불
가야산 능선 사이 용현계곡 오르니
우뚝솟은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미소
햇살 비치는 각도따라 표정도 제각각
조선3대 읍성 중 하나인 ''해미읍성''
조선 태종때 쌓기 시작해 세종때 완성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서산(충남)=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충남 서산의 가야산. 백제 시대의 다양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산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상왕산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산 아래 가야사를 세우면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인 가야봉을 비롯해 석문봉, 옥양봉, 수정봉 등 많은 봉우리가 능선을 이룬다. 그 능선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 용현계곡이다. 약 5km에 이르는 이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주변 숲이 울창해 사시사철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이 하천가의 우뚝 솟은 우람한 바위 벼랑에 백제인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소위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 마애여래삼존불(마애삼존불)이다.

충남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기 위해서는 용현계곡을 건너 산길로 조금만 오르면 된다.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삼존불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승용차를 타고 간다면 용현계곡 입구를 찾아가면 된다. 버스로 간다면 ‘마애삼존여래상’ 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 계곡 입구에서 계단 따라 약 300m쯤 오르면 관리소와 입구가 나오고, 그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거대한 암벽에 선명하게 새겨진 삼존상과 마주할 수 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절집을 잃어버린 채 부처님은 한데로 나와 앉았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약 1500년 전으로 시계를 돌릴 필요가 있다. 6세기 말, 백제는 한강을 두고 경쟁하던 고구려에 밀려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천도를 했다. 한강을 빼앗긴 백제는 중국으로 건너가려면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해야 했다. 그 중심지가 당진과 태안이었다. 공주와 부여에서 당진과 태안으로 가려면 서산과 예산을 거쳐야 했고, 가야산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당시 백제는 이 교역로 곳곳에 불상을 모셨는데, 태안의 마애삼존불과 예산의 화전리 사면석불 등은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길목마다 삼존불을 새겨 놓은 것은 교역을 위해 오가는 백제인들의 안녕과 평화를 빌기 위함이었다. 삼존불이 온화하고 넉넉한 미소를 지닌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삼존불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58년에 문화재 현장 조사를 하던 중 지나가던 한 나무꾼이 인바위라는 곳에 옛날 힘이 센 장사가 부처님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가보니 깊은 산중에 마애여래삼존상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한 마애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1962년에는 국보 제84호로 지정됐다.

서산 마애삼존불에서는 미적인 우수성 외에 당시의 과학 수준도 엿볼 수 있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불상의 표정이 변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삼존불은 동동남 30도에 있는데, 이는 햇볕을 가장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경부의 석굴암 본존불도 같은 방향이라고 하니 우연은 아닌 듯하다.

삼존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보원사지도 함께 다녀올 만하다. 10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폐사지에서는 석조와 당간지주, 오층석탑 등 보물급 유물이 다수 나왔다. 또 1968년에는 백제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금동여래입상도 함께 발견했다.

조선 3대 읍성 중 하나인 해미읍성의 성곽


◇ 조선 3대 읍성 중 하나인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읍성 중 원형을 가장 잘 보존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해미(海美)는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 조선시대부터 사용했다. 조선 태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에 완성했다. 높이 5m, 둘레 1.8km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조선 초기 충청병마절도사가 근무한 영(사령부)이 자리한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1579년(선조12) 훈련원 교관으로 부임해 전라도로 전임 할 때까지 10개월간 근무했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나와 5분이면 해미읍성에 닿는다. 읍성으로 들어서기 전에 성곽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다. 성곽에는 청주, 공주 등 희미하게 고을명이 있다. 축성 당시 고을별로 정해진 구간을 맡아 성벽이 무너질 경우 그 구간의 고을이 책임지도록 한 일종의 공사실명제다.

읍성 안에는 동헌과 객사, 민속 가옥 등이 있다. 남쪽의 정문 격인 진남루에서 동헌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둥근 담장을 두른 옥사(감옥)가 있다. 이 옥사에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었다. 서산과 당진, 보령, 홍성, 예산 등 서해 내륙 지방을 내포(內浦) 지방이라 일컫는데, 조선 후기 서해 물길을 따라 들어온 한국 천주교가 이곳을 중심으로 싹틔웠다. 조선 후기에는 주민 80%가 천주교 신자였을 정도다.

해미읍성 진남문


읍성 내 옥사는 당시 충청도 각지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로 가득했다. 옥사 앞에 커다란 회화나무가 있는데, 이 나뭇가지 끝에 철사를 매달고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고문·처형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 나무에는 사람을 매단 철사 자국이 있다. 순교의 역사를 뒤로하고 바라보는 읍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읍성 안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는데,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주민과 관광객의 모습이 유적지가 아니라 공원에 들어선 느낌이다.

해미순교성지도 읍성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 일대는 ‘여숫골’로 불린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끊임없이 외쳤는데, 이것이 ‘여수머리’를 거쳐 ‘여숫골’이 됐다는 것이다. 신자들을 묶어 물웅덩이에 빠뜨려 수장한 ‘진둠벙’, 생매장당한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 무명 순교자의 묘, 천주교도들의 사지를 붙잡고 내리쳐 처형하던 ‘자리개돌’이 전시돼 처절했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해미순교성지 원형 성당


◇여행메모

▲가는길= 수도권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안쪽이면 가닿는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나들목으로 나와 운산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운산면사무소를 지나 용현휴양림 방면으로 우회전하고 이어 숙용벌삼거리에서 서산마애삼존불 방면으로 좌회전해 따라가면 된다.

▲여행팁= 서산마애삼존불은 햇벝이 비껴드는 때가 계절마다 다르다. 6월에는 오전 9시에서 11시 무렵까지 해가 뜬다. 오전 10시 30분 정도에 삼존불에 햇볕이 가장 잘 비친다.

▲먹을거리= 서산을 대표하는 식재료 중 하나는 ‘굴’이다. 특히 굴밥이 별미다. 간월도 부근에 맛동산, 큰마을영양굴밥 등 알려진 맛집들이 있다. 박속낙지탕도 유명한 음식이다. 왕산포구의 왕산포횟집이 잘 알려져 있다. 해미읍성 부근의 ‘영성각’은 짬뽕이 맛있다.

해미순교성지 연못에 있는 기도하는 성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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