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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만 110통이 넘게 전화가 왔어요.”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만난 에어컨 설치·수리 기사 장주혁(54)씨.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통성명할 짬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장씨는 특정 제조사에 소속돼 있지 않은 개인사업자다. 제조사 서비스센터의 업무량 폭증 탓에 에어컨 설치가 늦어진 고객들이 주로 장씨를 찾는다.
유례없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에어컨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롯데하이마트에 따르면 지난달 16일~31일 2주간 에어컨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75%나 증가했다. 폭염 탓에 판매가 급증하면서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서울 및 수도권은 6~9일, 남부지역은 7~11일가량을 기다려야 한다.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장씨를 도와 트럭에서 장비들을 내렸다. 수십 킬로에 달하는 공구함부터 진공기와 냉매가스통, 구리관 등을 짊어지고 고객의 집으로 올라갔다. 다음 고객에게 빨리 이동하기 위해 1분 1초가 아까웠다. 아직 작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장씨는 “역대급 폭염 탓에 하루 수백 통씩 전화가 걸려온다”며 “너무 바빠 전화를 다 받지도 못하고 받는다 해도 예약을 다 잡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 서비스센터 업무폭증에 개인업자에 예약 폭주
초인종을 누르자 주부 김모(33)씨가 현관문을 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김씨는 “이사를 왔는데 서비스센터 예약이 한참 밀려 에어컨 이전 설치를 못했다”며 “3살짜리 아이가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있었는데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기온은 37.9도까지 치솟았다. 에어컨을 설치하지 못한 김씨 집의 실내 온도는 36도로 바깥과 큰 차이가 없었다.
장씨는 “원래 담당 지역인 서울 송파구 외에 다른 지역은 출장을 나오지 않는데 3살 아이가 잠을 못잔다는 얘기에 마음이 짠해 달려왔다”며 공구함 뚜껑을 열었다.
장씨는 실내 구조와 설치할 제품을 파악한 후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필요한 부품을 더 가지고 왔다. 장씨는 “아파트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며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 가면 부품을 가지로 왔다갔다 하다 진이 다 빠진다”며 웃어 보였다.
장씨를 도와 에어컨 속 구리 배관과 벽 속에 있는 매립배관을 용접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용접을 시작하자 열기에 온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김씨가 얼려놓은 수건을 건넸지만 이를 받아들 여유도 없이 작업이 이어졌다.
작업을 시작한 지 두 시간. 어느새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씨는 오전 작업을 마치고 곧바로 넘어온 탓에 점심도 해결 하지 못한 채 작업을 이어갔다.
장씨는 자장면을 시켜놨다는 김씨의 말에 “이렇게 감사한 분들도 있지만 밥을 먹기는커녕 늦게 오거나 제때 오지 않는다고 욕을 하는 분들도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씨는 ‘뒤에 예정된 스케줄이 걱정’이라며 자장면 한 그릇을 5분 만에 해치우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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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점심식사 후 실외기 설치작업이 이어졌다. 선풍기도 없는 좁은 창고에 웅크려 앉아 진공기로 배관 속 공기를 빼낸 후 냉매가스를 채워넣었다. 공간이 좁은 탓에 필요한 공구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땀이 쏟아졌다.
장씨는 “베란다 밖에 실외기를 설치해야 할 때는 아찔한 경우도 많다. 이 집은 새로 지은 아파트여서 실내에서 작업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실외기 설치가 끝나고 ‘이제 좀 쉬겠구나’ 생각한 순간 장씨가 안방 벽걸이 에어컨 설치를 시작했다. 크기가 작다고 작업이 쉬울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차로 내려가 사다리를 가져와야 했다. 에어컨을 제대로 달기 위해서는 수평자와 줄자 등을 이용해 에어컨 위치를 정확하게 표시해야 한다. 에어컨을 매달 지지대를 설치하고 에어컨을 들어 올려 벽에 고정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작업을 모두 끝내니 오후 4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작업 내내 울린 장씨의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 60여 통이 찍혀 있었다. ‘도대체 언제 오느냐’는 문자도 눈에 띄었다. 장씨는 에어컨에서 냉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공구를 챙겼다. 고마워하는 김씨의 인사를 뒤로 하고 곧바로 다음 장소로 향했다.
장씨는 “요즘엔 보통 하루에 4대 정도를 설치한다. 9개를 설치한 날도 있었다”고 했다. 장씨는 아침 7시면 집을 나서 자정을 넘겨야 귀기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정신없이 바쁘지만 설치를 끝낸 집처럼 ‘폭염에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워하는 분들 덕분에 힘을 낸다”고 웃었다. 공구를 챙겨든 장씨는 곧바로 다음 장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