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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데일리 안승찬 특파원] 이 정도 틀리면 민망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다들 그랬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뉴욕 증시는 ‘L자’ 형태를 그리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L자가 무엇인가. 주가 그래프 모양이 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듯 수직으로 떨어지다가 결국 옆으로 길게 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다. 선무당 예상이 아니다. 미국 월가의 투자은행 메릴린치 전망도 그랬다. 하지만 막상 트럼프가 당선되자 ‘트럼프 랠리’가 펼쳐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시간을 다시 더듬어 보자. 미국 대선이 치러진 지난 8일(현지시간) 오후 10시쯤부터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다는 얘기가 거론되기 시작할 때만 해도 다우지수 선물은 수직 낙하했다. ‘이제 악몽이 시작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정을 넘기면서 분위기가 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새벽 3시쯤 승리를 확신한 트럼프가 단상에 올라 승리 연설을 하자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트럼프는 “국가를 재건하겠다”면서 “낙후된 도심지역를 고치고 고속도로와 교량, 터널, 공항, 학교, 병원을 재건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이건 케인스주의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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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가 누군가. 대공황을 극복한 뉴딜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경제학자다. 그는 총 수요가 총 소득에 미달하면 불황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경제가 나빠질 땐 정부가 적극적으로 재정지출을 늘려 시장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100억원을 들여 다리를 건설한다고 생각해보자. 일당을 두둑하게 받은 건설노동자는 모처럼 가족과 외식을 한다. 매출이 늘어난 식당 사장님은 기분이 좋아져 종업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고 그 종업원은 집에 가는 길에 돼지고기 한근을 사 들고 집으로 향한다. 그 정육점 주인은 퇴근길에 대폿집에서 소주 한잔하는 등 이렇게 투입된 100억원이 만든 소비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300억원, 500억원의 총 소비를 이끌어낸다는 게 케인스 이론이다.
‘그 돈 100억원은 하늘에서 떨어지나. 정부가 어디선가 돈을 꿔와야 하는데(채권 발행) 그럼 정부는 빚에 허덕이게 되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 아니냐’는 반론에 대해 케인스는 이렇게 답한다. ‘적자 좀 나면 어떠냐. 총 소비가 살아나면 결국 기업과 가계 소득이 늘어나고 그럼 세금이 더 걷히니까 괜찮다’고 말이다.
트럼프도 케인스와 똑같이 말한다. 재정지출은 늘리는데 법인세와 소득세를 낮추면 정부 재정적자 문제가 심각해질 것 아니냐고 비판하면 경제가 좋아져 실제로 거둬들이는 세금은 안 줄어들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영락없는 케인스주의자다.
케인스와 트럼프의 흥미로운 공통점이 또 있다. 둘 다 심하게 잘난척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다니던 케인스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남들은 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걸까. 너무 멍청해서일까, 아니면 너무 약해서일까.” 국가 공무원시험을 본 케인스가 자신의 경제학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오자 “이 사람들을 내가 가르쳐야겠다”며 시험 채점관 자질을 의심했던 위인이다.
트럼프 역시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자아도취적 인물이다. 13살 때 음악 교사에게 주먹을 휘둘러 눈에 퍼런 멍을 만들고선 “그 교사가 음악에 대해 쥐뿔도 몰랐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책을 거의 읽지 않는 트럼프는 “긴 자료를 일일이 읽는 것은 시간 낭비다. 나는 사안의 핵심을 쏙쏙 뽑아 흡수하는 능력을 지녔다. 아주 뛰어난 효율적 인간”이라고 자평한 적도 있다.
공무원이 됐다가 따분하다는 이유로 때려치운 케인스가 아이러니하게도 정부 중심의 재정정책을 강조했던 것처럼 정부 경험이 전혀 없는 트럼프가 정부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묘한 일치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는 케인스와 트럼프는 직접 팔을 걷어붙여 뭔가 해야 직성이 풀렸다.
정부가 경제 살린다고 돈을 뿌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만약 그 정부 리더가 형편없다면 어떤가. 인종차별적 막말을 일삼고 마초적인 데다 국민 말은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안하무인격 지도자가 운전대를 잡았다면 말이다. 나 같으면 같은 차에 타고 있기가 참 무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