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대표를 뽑는 토론 현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비난 그리고 비난뿐이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논리로 가득하다. 국민을 위해, 당을 위해 당신보다 내가 더 좋은 정책과 비전을 갖고 있다고, 그걸 내가 꼭 해내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다 부적격자라고 말하니 그런 부적격자들이 이끌겠다는 정당을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어찌 보겠는가.
심지어 같은 지지자들도 패가 나뉘어 몸싸움까지 하는 이런 아수라장 같은 정치 현장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 중심에 있는 정치인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국민의 삶, 그리고 내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는 실종됐다. 국민이 먹고사는 이야기, 미래는 이래야 한다는 이야기는 서로를 향한 삿대질과 고성에 가려 사라지고, 정치적 앙금만 남아 화를 더 큰 분노로 키우는 일에만 몰두한다. 토론의 기본은 ‘격한 공감, 부드러운 반대’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 정치에서 이런 토론은 기대하기 힘든 걸까?
최근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에 따르면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실시한 ‘2023년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에서 광주지역 초등학생 22.8%, 중학생 38.7%, 고교생 24.7%가 희망하는 직업이 없다고 답했다. 광주 청소년 10명 중 3~4명은 “원하는 직업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 우리 아이들 꿈에 ‘정치인’은 우선순위에 없다. 오히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이 정치 뉴스를 볼까 두려워 한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코미디는 사람을 즐겁게 웃기지만 정치판에서는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로 사람을 슬프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정치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가. ‘국민을 위하여’라고 말할 자격이나 양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미 ‘정치’라는 단어와 ‘국민’이라는 단어는 정서적으로 분리됐다. 오로지 이쪽 패거리, 저쪽 패거리만 남았다.
최재천 교수의 ‘숙론’이라는 책 표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런 화두는 이미 정치 현장에서 사라졌다. 정치적 의리도 없고 자기가 내뱉는 말에 대한 증거, 근거, 논거도 없거나 빈약하다. 그리고 스스로 뱉은 말에 대한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 그저 우리 편과 적만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저질스러운 인간들 밑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히틀러의 수사학’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대중에게 이성적으로 다가가면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건드리면 아주 단순한 구호에도 따라옵니다’. 정치판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해줄 수 있는 한마디다. 이성적 호소도, 감성적 호소도 다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게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정치인들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은 정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요즘 화제인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야. 더 큰 거짓말이지”. 이 대사를 들으며 우리 정치판이 읽혔다.
옳은 말이면 상대방의 말에도 손뼉을 쳐 주고 틀린 말이면 동지에게도 조언할 수 있어야 우리 정치가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신념을 부수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오직 네 편, 내 편만 있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 편이 많은 정치는 어때야 하는지 정치인들이 한 번쯤은 생각을 멈추고 질문해 보기를 바란다.